우리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민족 혹은 민족정기라는 말은 그 자체 무엇의 가치판단 기준이 될 수 없으며 그런 까닭에 민족 혹은 그 반대편에 세운 반민족이라는 가치로 재단한 친일파는 성립할 수 없는 폭거라는 말을 나는 입이 아프도록 지적했다.
민족 혹은 민족정기라는 말은 그 자체 가치판단 준거가 될 수 없거니와 돌이켜 보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폭거가 얼마나 많은가?
나치즘만 해도 게르만 민족주의를 저변에 깔고 있으니 꼭 나치즘이 아니라 해도 민족은 그 자체 절대선이어서 무엇을 그 기준으로 판별할 수 없는 폭력이다.
따라서 해방 직후 과거사 청산 일환으로 시도했다가 무산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두고 이른바 역사를 한다는 자 중에서는 그것이 성공했어야 한다고 울분을 토하나, 그 자체 필연으로 실패해야 했으며 실제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까닭은 그것이 내포한 형용모순 때문이었다.
왜 저 정풍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격렬한 반발을 불렀을까?
그것이 친일파로 지목한 사람들부터 대부분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까닭이다.
그 친일의 대명사로 간주하는 춘원 이광수나 육당 최남선만 해도, 그들의 글 행동 어디를 훑어봐도 철저한 내셔널리스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직 민족을 떠날 수 없었으며, 동시대 어떤 누구랑 비교해도, 그 대척점에 섰다고 간주할 만한 단재 신채호 혹은 백범 김구만큼이나 처절한 내셔널리스트였다.
이런 사람들한테다가 너 친일이다, 너 반민족이다, 너 민족정기를 훼손했다는 잣대를 들이댈 수는 있으며, 설혹 들이댄다 한들 그들이 승복이나 하겠는가? 네어에버엔딩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그랬으니, 이 처절한 모순을 예리하게 직시한 이는 역설적이게도 작금 친일청산운동의 절대논리를 제공한기 임승국이었다. 그가 뭐라고 했는가? 다른 건 몰라도 친일파들의 민족주의 정신은 배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역설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소위 친일에 입각한 과거사운동을 추진하는 자들이 장착한 가장 결정적인 하자가 바로 이것이다.
친일親日? 그것이 민족을 떠나지 아니하는 한 오리엔트환상특급에 지나지 않으며, 민족 혹은 민족정기를 기반으로 구축한 그 정풍운동이야말로 나치즘 파시즘 광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 이 운동은 그것이 표방했을 정신과는 달리 파시즘이고 나치즘이다. 실제 이 운동을 맹렬히 추진하는 사람들한테서 나는 그 눈빛을 본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광기를 말이다.
태평양전쟁기 비행기 헌납?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 그것이 어찌 반민족이 된단 말인가? 그렇담 그 반대편 누구한테 비행기를 헌납해야 하며, 누구한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단 말인가? 이 물음을 묻지 아니했다.
그것을 처단하려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다가 민족 혹은 민족정기를 내세웠다. 민족 앞에 비행기를 헌납하고, 민족정기 앞에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상해 임시정부에다가, 또 다른 어디 해외 독립단체에다가 비행기를 헌납하고 돈도 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로 역설적이게도 그렇다고 주장하는 친일파가 많다. 이 역설 또한 단순히 분식으로 볼 것인가?)
내가 어찌 민족 앞에, 민족정기 앞에다가 세금을 내고 헌금을 하며 충성을 맹세한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고, 설혹 과거에 태어났다 한들 그럴 생각 눈꼽만큼도 없다. 내가 왜 민족이라는 괴물 앞에다가 나를 희생한단 말인가?
내가 존중해야 할 것은 시종하고 일관해서 인간다움이 있을 뿐이다. 그 인간다움을 나는 존중하며 추앙한다. 그 인간다움은 내가 비록 체득하고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모름지기 이러해야 하는 준법이 되는 까닭에 나는 그것을 추앙하며,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을 모범으로 다시 추앙하는 것이다.
이 인간다움이 있을 뿐이다.
태어날 때 이미 대일본제국신민이었고, 그 국가시스템에서 자란 사람더러 그 국가를 위해, 천황이라 일컫는 그 수괴를 위해 충성을 맹세했다 해서, 비행기를 헌납했다 해서 그것이 어찌 반인륜이 되겠는가?
독립한 훗날 그 일이 쪽팔리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어찌하여 반민족범죄가 되겠는가?
육사 대표로 천황한테 충성했다고 그것이 친일인가? 그렇다면 일제시대 소학교 보통학교를 다니며 매일매일 천황 찬가를 부른 이 땅의 학생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저짝은 소위라서 그래서는 안 되고, 이짝은 철없는 학생들이라 용납이 된단 말인가?
돌이켜 보면 이 친일이라는 시각, 그 절대의 준거가 되는 민족 혹은 민족정기는 상해 임시정부가 대표하는 해외파 기반 절대의 시각이다. 해외의 눈으로, 해외 독립운동을 시각에서 조선 국내를 바라보며 그것을 마음껏 재단한 것이 바로 저 친일파라는 괴물이다.
어찌 식민지시대 조선에서 산 행위를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중국에서, 미주에서 독립운동하는 시각으로 재단할 수 있단 말인가? 쪽수로 봐도 2천만이나 드글거린 조선의 시각에서 봐야지, 어찌하여 한 줌 되지도 아니하는 저런 해외의 시각에서 본국 조선을 재단한단 말인가?
그 해외를 기반으로 삼는 독립운동, 또 국내에 암약한 미미하지만 절단이 없던 독립운동은 그래서 더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서 그 몇몇의 시각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상해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규정했다 해서, 그 주체의 시각으로만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그건 법이지 실상은 아닌 까닭이다.
또 말하지만 민족 혹은 민족정기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아서, 내가 어떤 색깔을 주입하느냐 따라 너무나 다양한 색깔을 낸다. 그것이 때로는 숭고한 무엇이 되기도 하겠지만, 또 숭고한 무엇이기에 그 이름으로 각종 불법 탈법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음을 역사를 똑똑히 기억한다. 유대인 학살은 다름 아닌 민족 혹은 민족정기가 저지른 폭거다.
또 항용 말하듯이 굳이 친일파를 단두대에 세워 처단하고 싶거덜랑 민족이니 민족정기니 하는 덜 떨어진 폭력 말고 더 숭고한 그 무엇, 예컨대 반인륜범죄나 정의, 맹자적 관점을 빌린다면 인간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불인지심不忍之心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그가 인간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짓거리를 했느냐 안했느냐 이것을 뛰어넘는 잣대 있던가? 어줍잖은 민족 타령 민족정기 타령은 집어치울 때다.
친일파의 반대편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누구나 다 민족주의자일 수 있으며, 그 민족주의는 때로는 독립운동가로 전향케 하며 때로는 친일파로 만들기도 한다.
민족이 본래 그렇다. 이리저리 물든다. 잡색이다. 이런 민족이 어찌 무엇의 판단 준거가 된단 말인가?
그래도 끝까지 민족을 포기 못하는 자들은 그래서 열린민족주의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내세웠는지 알 수는 없지만, 민족주의는 그 자체 차별과 억압을 전제로 성립하는 까닭에 결코 열릴 수도 없고, 열려서도 안 된다.
그 열린민족주의는 파시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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