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철감선사 부도탑(왼편)과 그 신도비(오른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 191-1 번지에 소재하는 쌍봉사라는 사찰 서쪽 뒤편으로 올라간 쌍봉산 기슭에 통일신라말, 이곳을 무대로 이름을 떨친 철감(澈鑒)이라는 선사(禪師) 산소가 있다. 이 무렵이면 승려는 거의 예외없이 다비를 할 때라, 원성왕 14년(798)에 출생한 철감이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하자, 그 역시 다비식을 하고는 그 유골과 사리를 수습하고는 그것을 봉안할 산소를 조성하고 그 인근에는 선사의 공덕을 칭송하는 신도비를 세우니, 그것이 현재는 저리 배치되어 있다. 승려 무덤은 여타 직업 종사자 혹은 다른 신분과는 독특하게 다른 점이 있어, 역시 승려임을 표시하고자 그 모양을 탑으로 만들었으니, 불교에서 탑은 바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산소인 까닭이라, 이 전통을 살린 것이다.
저 두 석조물은 한눈에 봐도 소위 비례가 맞지 않음을 눈치챈다. 부도탑과 신도비가 비율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하도 저 모습이 익숙해 그런갑다 한다. 좀 자세히 보면 짜리몽땅 납딱이라, 뭔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 난다.
그 명패를 자세히 살피면 '쌍봉사 고 철감선사 비명'이다.
비명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철감선사가 생전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를 적은 구절은 어디갔는가? 사라지고 없다.
동아시아 모든 비碑, 특히 신도비神道碑는 패턴이 있다. 거북 모양 받침돌이 있고, 그 등 한복판을 직가각형으로 쪽개고 파낸 다음 그에다가 넓데데한 판석을 세우거니와, 이를 사람으로 치면 몸뚱아리에 해당한다 해서 비신碑身이라 하며, 그 위에다가는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머릿돌을 얹는다. 이 머릿돌에는 용 혹은 이무기를 새기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를 이수螭首라 부른다. 이 이수 전면 복판에다가 문패를 달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철감선사 신도비는 거북이 받침돌과 용 문양 머릿돌만 있고, 비신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 똑같은 꼴이 여주 고달사지에서도 벌어진다. 아래가 이곳 원종대사 혜진 스님의 탑비다. 이 역시 몸뚱아리는 없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반면 아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몸뚱아리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저 거무틱틱한 몸뚱아리 전면과 뒷면, 그리고 때로는 측면까지 활용해 이 스님이 무척이나 훌륭한 분이었다는 찬송가를 잔뜩 써놓기 마련이다. 이 탑비와 세트를 이루는 그의 부도탑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해제 보수 중인데, 그것이 끝나면 아마 본래 자리, 그러니깐 저 탑비 바로 앞쪽으로 올 것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몸뚱아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아가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이런 현상과 관련해 밑도끝도 없는 일제 수탈 신화가 또 작동한다. 걸핏하면 일본놈들 악랄한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것이라, 이게 참으로 만병통치약과도 같아, 비석 몸뚱아리를 없앤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일삼은 자들이 일본놈이라는 신화가 강력히 작동한다. 이 경우 더욱 재미난 현상이 벌어지는데, 식민지시대에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고 할 때는 일본놈 소행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이 경우에도 참으로 기발난 왜놈 타령을 일삼게 되는데, 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 소행이라고 밀어부치는 수법이 그것이다. 이런 수법은 조선후기 때 조선사대부들한테서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언설이다.
실제 저와 같은 문화재 현장에서 저와 같은 일제 만행론은 개독 신앙보다 더한 확고한 위력을 뿜어내곤 한다. 이런 '신앙'에 의하면 모든 나쁜 짓은 다 일본놈이 해야 한다. 지금은 아마 문화재 안내판이 교체된 듯한데 당장 저 철감선사 신도비만 해도 그 안내판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신은 일제시대에 잃어버렸다고 전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놈이 때려 부수었다는 뜻이다.
한데 일본놈 소행이라 밀어부치면 참 말끔해서 좋기는 한데 그래도 못내 찜찜한 대목이 있다. 첫째, 일본넘들이 할 일 없어서 멀쩡한 비석 중에서도 몸통만 쪼갠단 말인가? 그들이 극악무도하면 몸통만 아니라 대가리 받침 다 깨부셔야 하는 거 아닌가? 둘째, 일본넘들 역시 불교국가인데(물론 이 경우 신불습합이라 해서 신도 성향이 강하긴 하나, 일본 사회에서 부처가 차지하는 위치는 막중하기만 하다) 그런 불교도들이 감히 스님 신도비를 부순단 말인가? 이 무슨 개망나니인가?
더불어 탑비는 언제나 부도탑과 쌍을 이루는데 많은 경우, 아니 거의 절대적으로 부도탑은 지광국사 혜린 스님의 그것처럼 전체를 몽창 뽑아가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에 완상하기 위함이었거니와, 어떻든 부도탑은 대부분 멀쩡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도대체가 설명할 수가 없다. 기왕 때려부술 것 같으면 신도비만 아니라 부도탑도 때려부수어야 정상 아닌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놈 소행론은 눈꼽만큼도 눈길을 줄 필요도 없다. 다 개소리로 보고, 지나가는 똥개가 짓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석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신라 태종무열왕비도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가고 없느냔 말이다. 이유는 딴데 있다. 일본놈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
더불어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과도 전연 무관계하다. 그렇다면 받침돌과 머릿돌도 만신창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렇다면 비신은 파편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철저히, 이 비명은 몸통만, 그것도 처절히 파괴했다.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서 그 파편들은 가루로 만들다시피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이다. 몸통만 없애고자 하는 고의 혹은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 짓인가?
볼짝없다.
유독 글자만 파괴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범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글자를 필요로 했는가?
탁본이다.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자들이 그걸 없앤 것이다. 이 탁본의 고통은 한겨울에 그걸 딱 한 번만 해보면 안다. 탁본의 고역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역사를 인멸했다.
결론한다.
서예에 미친 놈들이 걸핏하면 비석 글씨가 좋다고 소문나니, 그리하여 걸핏하면 그것을 관리하는 현지 지방관한테 부탁해서는 탁본 좀 떠서 보내라 하니, 그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현지 주민들이 에랏, 내가 이 한겨울에 이게 무슨 짓이냐 해서 도끼로 깨뜨려 버린 것이다. 첨엔 깨뜨려서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파편들이라도 탁본해서 보내라는 명령이 자주 내려왔다. 열받은 현지 주민들, 니미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그 파편들조차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몸통이 사라진 저런 고대의 비석들에서 우리는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이른바 민초의 고통을 읽어내야 한다. 나는 이런 고통을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 역사학의 책무 중 하나라고 본다. 더불어 걸핏하면 왜놈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내셔널리즘의 욕망도 낱낱이 그 민낯을 까발려야 한다고 본다.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원이 역주한 《조선불교통사》 제4권(동국대학교출판부. 376~377쪽)에 실린 다음 이야기를 부록으로 첨부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추후 이 글은 계속 보강해 나가기로 한다. 잠시 덧붙이건대 인각사비도 같은 이유로 훼멸되었다.
<중국의 탁본 요구에 지친 백성들이 비를 동강내다>
단목端目스님이 김생의 글자를 모아 「백월선사비白月禪師碑」를 썼다. 본래 봉화군 타자산駝子山 석남사石南寺에 있었는데, 절이 폐허되고 비만 남은 지 오래되었다.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그 필적을 보배처럼 아껴, 정덕正德4년(1509) 8월 영천군 자민루子民樓 아래로 옮겼다. 원 ‧ 명 이래 중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매번 다 인출印出하여 돌아가 지극한 보배로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도강渡江하고 제일 먼저 김생 글씨의 시詩를 물으니, 이는 곧 『영천읍지永川邑誌』에 말한 바대로 명明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조선 땅에 찾아와 먼저 「백월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1천 장을 인출하여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후 (인출하는 일이) 백성들의 고충이 되자, 비를 두 동강 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숙종 19년(1693)에 다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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