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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태종무열왕릉은 다른 데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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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분지 기준 서쪽을 정좌定座하는 까닭에 그 이름을 선도산仙桃山이라 하니, 이는 동아시아 고대가 상상한 서쪽의 산이 곤륜산이며 그 곤륜산엔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성 신이 주석하고 그에는 먹으면 장수 혹은 영원불멸을 보장한다는 선도仙桃 복숭아 산지인 까닭이다.

이미 신라 당시에 저와 같은 이름을 얻은 선도산은 그런 까닭에 서악西岳이라고도 하고 서형산西兄山과 같은 이칭이 있었으니 서왕모에 비견하는 여성으로 사소라고 하는 박혁거세 엄마가 신이 되어 주석하는 데라 생각했다.

왜 김유신 누이 보희가 하필 저 서형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계림이 물바다가 되는 꿈을 꾸었겠는가?

서형산은 신라 건국을 모태하는 자궁子宮이라 그 자궁은 일세의 영걸을 생산하니 저 꿈에서 비롯한 삼한의 영걸이 바로 김법민이라 그가 훗날 죽어 문무文武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저 서형산 기슭엔 무수한 신라시대 무덤이 포진하니 다만 지금은 공원으로 잘 단장된 곳을 중심으로 주변 다른 무덤들에 견주어 특히 우람함을 자랑하는 거대 봉분 네 기가 동서 방면으로 신기하게도 모조리 월성을 바라보며 포진하거니와 그 무덤별 주인공이 아리숑숑하기는 하나 법흥 진흥 무렵 그네들을 포함하는 왕가의 최고권력자가 묻혔음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거대 봉분 네 꾸러미 전면에 그보다 훨씬 규모가 짝은 봉토분 하나가 있어 지금도 그 봉분 테두리를 따라 석축열이 확인되는데 내부 구조는 석실石室로 보아 대과가 없다.

그 전면엔 몸뚱이리는 박살나서 다 사라지고 발바닥이랑 머리 부분만 덩그러니 남아 착 달라붙은 땅달보 신라시대 석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태종무열왕비 잔편이다.




그 주인공은 그 정수리비에 해당하는 데에 태종무열왕이라는 글씨가 있어 의심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 이 돌삐는 김춘추가 왕으로 있다가 죽어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받고선 그 무덤을 맹글면서 그 앞짝에 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태종무열왕릉은 어디인가?

보통 이런 신도비는 그 묘역으로 통하는 입구 혹은 봉분 앞에 세우는 일이 상례거니와 그것을 인정하면 저 뒤쪽 어딘가가 그의 무덤이다.





이와 관련해 현재는 의심이 없어 저 신도비에서 가장 가까운 저 무덤을 태종무열왕릉이라 간주한다.

하지만 과연 저 무덤이 태종무열왕릉인가?

나는 이를 매양 의심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확증하는 증거는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다.

그렇다는 근거는 오직 현재의 신도비에서 가장 가까운 무덤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저 무덤은 왕릉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규모가 적어 저 도로 맞은 건너편 김인문 묘 혹은 김양 무덤 정도에 해당한다.

저 시대 왕릉은 저 뒤편 나란히 열을 지은 거대 봉분 네 개와 맞먹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태종무열왕릉은 저 네 거대 봉분 중 하나다.

어디인가?




이번 힌남노 태풍에 붕괴하고서 대일밴드를 바른 저 맨 끄터머리, 혹은 아예 사진을 찍은 이 지점이 태종무열왕릉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현재의 무열왕비가 본래 이 신도비가 있던 자리인지 확증이 없다.
또 보다시피 현재 태종무열왕릉이라고 간주하는 무덤은 봉분 크기가 그 전면 김인문묘랑 거의 같거나 조금 클 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대 봉분 네 기 전면에는 공터가 있다. 저 공터가 훗날, 그러니깐 근현대에 만들어졌는지는 내가 자신이 없다.

혹여 저 지형이 신라시대 그것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면 다른 왕릉을 쓰고자 한 자리이거나 침전이 있을 만한 곳이다.

물론 이 역시 추정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내가 이 자리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태종무열왕릉이라 단정하는 곳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만 확인하기로 한다.

봉분 규모가 동시대 왕릉 혹은 그것임이 확실한 데랑 견주어 너무 빈약하며 또한 태종무열왕비가 현재의 그 자리라 해도 신도비는 봉분이 아니라 묘역 입구에 세운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광개토왕비가 그렇고 무수한 조선시대 종족묘역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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