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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한국과 일본, 그 앙시앙 레짐은 어떻게 끝나는가

by 초야잠필 2022.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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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구체제 종식은 어떤 방식으로 다가왔는가.

1. 한국:

조선이라는 구체제 종식의 기점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필자는 동학군에 의해 관군이 패배하고 전자가 전주성에 입성한 시기를 구체제 종식으로 본다.

훈련되지 않은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정부가 외국에 반란 진압을 위한 원군을 요청한 시기야말로 구체제 종식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황토현 전투. 비전투요원인 동학군이 관군을 격파함으로써 조선왕조는 사실상 끝났다. 동학혁명군은 "농민"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출신배경이 너무 다양하여 이를 분석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동학혁명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더 쪼개들어가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를 "농민"이라고 정의하면 이 혁명의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정확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우려가 있다.


2. 일본:

구체제 종식은 여러 기점이 있겠다. 메이지유신으로 볼 수도 있을 테고, 보신전쟁 종식으로 막부가 해체되는 시점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필자는 막부의 죠슈정벌 실패를 구체제 종식 기점으로 본다.

죠슈는 막말 근왕양이의 선구로 막부한테 문자 그대로 박박 대들었는데 이를 응징하기 위해 막부는 정벌군을 편성하여 공격하였다가 패배한다.

막부가 일개 번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패했다는 것은 막부가 해체기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며 실제로 이후 막부는 죠슈원정 실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번에는 반대로 천황을 끼고 관군이 되어 나타난 죠슈-사쓰마 연합군에 보신전쟁에서도 패한다.

조슈 정벌전에 출정한 막부군. 전통의 사무라이로 구성된 막부군은 우세한 화력에도 농민이 섞여 있는 조슈군에게 격파되었다. 농병분리를 원칙으로 하던 에도시대는 이 전쟁에서 막부군이 패함으로서 끝났다. 이 후 일본은 제국의 신민을 징집하여 유지하는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 군대가 사무라이 들이 모여 봉기한 서남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군을 격파하여 무사의 시대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이 시기 죠슈정벌에는 아주 특이한 군대가 출현하는데 바로 "기병대"다.

기병대란 사무라이만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아니다. 막부가 사무라이로 군대를 꾸려 쳐들어 온 반면 죠슈번은 농민들을 포함하여 군대를 꾸린다. 이 기병대가 큰 활약을 하여 막부가 죠슈정벌에 실패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다.

농민이 주축이 된 군대가 막부군을 격퇴했다는 점에서 한국 동학군이 관군을 격퇴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는 나온다 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일본의 경우 죠슈-사쓰마 등 당시 메이지유신 주역들은 막부 타도 후 자신들이 뭐를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을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막부 패배가 거의 확정되자 신정부가 수립되면 "도막은 하지만 양이는 안한다"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쉽게 말해 막부는 타도해도 외국과 싸우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들이 막부를 공격한 명분은 동학군의 "척왜양이"처럼 "근왕양이"였다.

하지만 막부가 넘어간 후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뒤집어 서구를 벤치마킹하기 위한 길에 매진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당시 메이지유신 주역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기병대와 동학군의 차이. 그 차이가 결국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갈랐다고 할 수 있다.

막부군과 싸워 이를 격파한 죠슈번 기병대. 이들은 사무라이가 아니라 농민의 자식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농민이 사무라이를 격파하는 것은 이후에는 빈번히 일어나 사이난전쟁 때는 사무라이를 대표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농민의 자식들을 징집하여 만든 근대정부군인 관군이 압도하여 박살내게 되었다. 이 사진의 기병대원 중에도 아마 그들의 아버지가 대대로 농사꾼이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조슈번 사람들은 메이지 유신 후 근대일본 건설의 주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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