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231)
눈 비친 창(雪窗)
[宋] 백옥섬(白玉蟾) / 김영문 選譯評
붕화 문수산 축서사
흰 벽에 푸른 등불
가물거리고
붉은 화로 한밤에
화기 깊다
눈꽃 피어
창 밖 환한데
한 조각 마음
추위 견딘다
素壁靑燈暗, 紅爐夜火深. 雪花窗外白, 一片歲寒心.
문수산 축서사에서
이런 시를 읽으면 어릴 적 겨울밤이 저절로 떠오른다. 초가삼간 사랑방에 호롱불이 가물 거리고, 방 가운데는 쇠죽 부엌에서 담아온 장작불 화로가 이글이글 탄다. 삭풍이 스쳐가는 창호지 하얀 문가엔 황소바람을 막는 문풍지가 파르르 떤다. 우풍이 심하여 윗목은 무릎이 시릴 정도로 한기가 스미지만 쇠죽 끓인 아랫목은 엉덩이를 붙이기 힘들 정도로 쩔쩔 끓는다.
화로는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품이다. 화로를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가 오간다. 가족, 친척간 소식과 근황, 가문 선조와 고을 위인 이야기, 나라를 구한 영웅 이야기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옛날 이야기가 그것이다.
화롯불에 구워 먹는 감자, 고구마, 밤은 긴긴 겨울밤 시장기를 채워주는 별미다. 네모난 아파트에서 밥만 먹고 나면 각자의 시선을 텔레비전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작은 대화 한 마디도 나누기 힘든 지금 세상 겨울밤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내가 이런 썰을 풀면 나이 60도 안된 사람이 대체 어느 시대 이야기를 하냐고 타박하지만, 우리 시골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처음 전기가 들어왔다. 밤에 호롱불 밑에서 숙제하다가 머리카락 태워먹은 일은 너무나 흔한 일화 중 하나다.
아침에 밖에서 세수하고 나서 방으로 들어오다 문고리를 잡으면 손과 문고리가 얼어서 쩍쩍 들러붙기 일쑤였다. 동네에 있는 국민학교 다닐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걸어서 15리 밖 중학교 다닐 때 겨울 통학 길은 발이 꽁꽁 얼어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잰 발걸음으로도 한 시간 넘게 걸려 학교에 도착하면 바로 언 발을 교실 난로에 녹여야 했다.
그렇게 동상에 걸린 발은 겨울 내내 빨갛게 퉁퉁 부어 신발을 신기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에는 세한심(歲寒心)이니 일편단심(一片丹心)이니 하는 고상한 이야기는 관심 밖이었고, 귀가 길에 마른나무를 긁어모아 피우는 황덕불에 가장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황덕불에 살찐다”는 속담이 왜 나왔겠는가. 그런 조선시대 촌놈이 지금은 21세기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참 아득한 세월을 건너온 셈이다. 갖가지 옛 생각에 젖어드는 세모다.
*** 김태식補***
지난 겨울
막무가내로 남쪽으로 향해 달렸다.
꼭 가자한 것은 아닌데 태백산맥 준령을 넘고파서
그리하여 그 바깥을 물들인 바다가 보고파
무작정 달렸더랬다.
가수 상태로 발길 닿은 곳이 봉화 축서사였다.
전면 이마를 꼬나보는 태양이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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