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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337년 5월 3일 세인트폴 성당 앞 사제 살인사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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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심 품은 불륜 상대 귀족 여성의 복수극

 

런던 시장 월워스Walworth가 왓 타일러Wat Tyler를 젊은 리처드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이고 있다. Source: User Bkwillwm/Public domain

 
런던 중세 귀족 여성이 사제를 암살하는 일에 공모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한 범죄학자가 약 7세기 전 런던 번화한 거리에서 목이 베인 채 살해된 사제 존 포드John Forde 사건을 해결할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다고.

이 케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범죄학 연구소 중세 살인 지도 프로젝트Medieval Murder Maps project에 등재된 사건 수백 개 중 하나다.

이 지도는 14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비자연적인 죽음을 기록한 데이터베이스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몇 가지 반전이 있다.

도대체 이 살인 사건은 무엇이고 어찌해서 일어났던가? 

마누엘 아이스너 Manuel Eisner 교수가 추적한 관련 사건 기록에 따르면, 1337년 발생한 존 포드 살해 사건은 그의 불륜 상대인 귀족 여성이 주도한 보복 살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즉, 이런 불륜 사실을 아마도 불륜을 저지른 성직자한테서 직접 알아낸 캔터베리 대주교가 해당 귀족 여성한테 수년간 굴욕적인 속죄를 명령하자 이에 반발해 다른 사람들과 공모해 벌인 살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살인사건이 있기 5년 전 이 캔터베리 대주교가 쓴 편지에는 존 포드 신부와 간통 혐의를 받는 엘라 피츠페인 Ela Fitzpayne이라는 귀족 여성한테다가 솔즈베리 대성당을 맨발로 부끄러운 걸음으로 걸을 것을 요구한다.

아이스너 교수가 발견한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혐의가 제기될 무렵 엘라 피츠페인은 실로 대담하게도 남편, 그리고 존 포드와 공모해 교회 수도원을 습격하고 건물에 침입하여 가축을 몸값으로 요구하는 강탈단을 이끌기도 했다고 한다.

명확한 연관성은 불분명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고 한다.

즉, 존 포드는 엘라 피츠페인의 저 범죄 조직에 가담하고, 아마도 그녀의 침대에 함께 있던 사이였다가 이후 돌변해 교회를 선동해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몇 년 후 그에 앙심을 품은 엘라 피츠페인은 주변 사람들을 사주해 과거의 애인 신부를 살해한다.  

포드를 죽인 범인 중 한 명은 엘라 피츠페인의 오빠이며, 다른 두 명은 그녀의 하인이 지목되었다. 

아이스너는 초저녁 군중이 몰려드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 근처에서 포드가 버젓이 살해된 것은 아마도 잔혹한 힘의 과시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직자들에게 귀족의 힘을 상기함으로써 엘라 피츠페인은 결코 과거를 잊거나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살인사건 검시관 보고서와 관련 서한의 디지털 사본이 대학 웹사이트에 함께 게시되었다.
 

마르텐 반 클리브 서클(Circle of Marten van Cleve)이 그린 '병사와 농민간 난투 Brawl between soldiers and peasants'(1565-1570) 세부. 새로운 '살인 지도'는 중세 런던 거리가 수많은 살인 사건의 배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Public Domain)



이를 탐구한 그의 논문이 형사법 포럼 Criminal Law Forum에 탑재됐다.

"우리는 영국 귀족의 주요 인물이 의뢰한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계획적이고 냉혈한 범행이며, 가족과 측근이 자행했다. 이 모두는 복수심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시사한다"고 아이스너는 말한다.

"엘라 피츠페인을 공개적으로 망신주려는 시도는 정치적 게임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회가 도덕성을 이용해 귀족에게 그들의 권위를 각인시켰고, 존 포드는 귀족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교회와 영국 엘리트층 사이의 긴장감을 드러내는 협박, 성매매, 그리고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으며, 결국 중세 암살단이 타락한 신의 사람을 마피아식으로 암살하는 사건으로 끝난다."

아이스너는 주로 14세기 검시관 명부 번역본을 기반으로 범죄 현장을 표시하는 디지털 자료인 중세 살인 지도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까지 런던, 옥스퍼드, 요크 지도를 제작했다.

라틴어로 작성된 이 명부는 검시관이 사실을 확인하고 평결을 내리기 위해 소집한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조사한 급사 또는 의심스러운 사망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중세 사법 제도의 초석이다다.

배심원단 기록에 따르면, 존 포드는 1337년 5월 3일 금요일 저녁 기도 후 해가 지기 전 치프사이드를 걷고 있었는데, 동료 사제인 하스컬프 네빌Hasculph Neville이 "유쾌한 대화"로 포드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이 세인트 폴 대성당에 접근하자, 엘라 피츠페인 오빠인 휴 러벨Hugh Lovell을 포함한 네 남자가 포드를 공격했다.

러벨은 30cm짜리 단검으로 포드 목을 찔렀고, 최근까지 피츠페인 부부를 위해 일한 휴 콜른Hugh Colne과 존 스트롱John Strong이라는 두 남자가 포드의 배를 찔렀다. 

묵주 제작자rosary-maker와 모자 제작자를 포함한 배심원단은 모든 암살자 신원을 밝혔지만, 그들의 행방은 모른다고 주장했다.

또한 배심원단은 피츠페인 부부가 포드와 오랫동안 불화 관계에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아이스너는 "살인자 신원을 밝히고 범인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배심원단은 가해자를 추적할 때는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최고 귀족 가문이었는데,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 재판을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엘라의 오빠는 압수할 재산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모두 믿기 어렵다. 이는 당시 계급 중심 사법 체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의 '곤봉 싸움Fight with Cudgels' (1819-1823). (Public Domain)



피츠페인의 전 하인 콜네는 결국 5년 후인 1342년에 이 범죄로 기소되어 뉴게이트Newgate에 수감되었는데, 이것이 이 사건과 관련된 유일한 기소였다.

포드가 살해된 웨스트칩Westcheap 지역은 연구 프로젝트 최신 논문에 따르면 런던에서 가장 두드러진 중세 살인 "핫스팟"이었다. 

수많은 시장, 선술집, 술집, 그리고 금세공업자와 마구상인 같은 강력한 길드가 자리 잡은 웨스트칩은 무역과 흥청망청 놀음의 중심지였으며 사건 또한 수없이 많았다.

웨스트치프에서 폭력 사태를 촉발한 흔한 요인으로는 상인이나 장인 간 다툼, 그리고 갱단 간 영역 다툼과 유사한 길드 견습생들 간 집단 싸움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존 포드를 처형한 사건처럼 여러 건 계획적인 보복 살인이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스너는 "웨스트치프는 형틀이나 목책과 같은 시민적 정의를 보여주는 장소였다"면서 "공개적인 처벌 의식 장소로서, 여기에는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살인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아이스너는 포드 사건을 조사하던 중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메펌Simon Mepham이 윈체스터 주교Bishop of Winchester에게 보낸 1332년 1월 서한을 발견했다.

이 서한에는 엘라 피츠페인이 "기사 및 기타 미혼, 기혼, 심지어 성직자"와도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녀의 행동에 대한 처벌에는 금, 진주, 보석 착용 금지, 수도원에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가장 공개적인 속죄는 영국에서 가장 긴 본당인 솔즈베리 대성당을 맨발로 걸어 4파운드(약 1.8kg)짜리 왁스 양초를 들고 제단까지 걸어가는 수치스러운 행진이었다.

피츠페인은 7년 동안 매년 가을마다 이 행진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편지는 피츠페인이 "교만의 영spirit of pride"과 악마의 유혹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거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4월에 발송된 추가 편지에는 엘라가 당시 윈체스터 교구Diocese of Winchester에 속한 로더하이드Rotherhithe에 숨어 있으며 파문당했다고 주장한다.

이 편지에는 연인으로 추정되는 존 포드 한 명만 언급되는데, 이는 그가 대주교에게 이런 사실을 고백했음을 시사한다.

당시 포드는 피츠페인 가문의 도싯 영지Dorset estate에 있는 마을인 오크포드 피츠페인Okeford Fitzpaine 교회 주임 목사rector였다.

"대주교는 엘라에게 엄중하고 수치스러운 공개적인 속죄를 강요했는데, 엘라는 이를 따르지 않은 듯하지만 복수심에 불타올랐을 가능성이 있다"고 아이스너는 말했다.

"존 포드가 교회 처벌을 피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더욱 그렇다."

1322년 3월의 또 다른 기록은 엘라 피츠페인과 존 포드가 모두 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에 기소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전년도에 엘라의 남편이자 인근 성 스토거시Stogursey 영주였던 기사 로버트 피츠페인 Sir Robert Fitzpayne 경과 함께 한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priory을 약탈했다.

그들은 수도원 문과 건물을 부수고 나무를 베고 채석장을 약탈하여 최대 18마리 소와 30마리 돼지, 그리고 약 200마리 양과 어린양을 압수해 성으로 몰아갔다.

위치와는 달리 이 수도원은 프랑스 수도원 전초기지였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 간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었고, 갓 즉위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1337년 포드가 살해당하면서 백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드의 교구는 스토거시에서 약 80km 떨어져 있었다.

"엘라는 오크포드를 방문했을 것이고, 포드는 성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고 아이스너는 말했다.

그는 포드가 피츠페인 가문과 공모하여 수도원을 습격함으로써 외교적 긴장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이스너는 "존 포드는 두 가지 충성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그의 교회 후원자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에게 직위를 부여한 피츠페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직자로서 그에게 권한을 행사한 주교들에게 대한 충성심이었다."

아이스너는 "메팜 대주교는 상류층과 귀족 계층의 도덕 규율을 강화하고 도덕적 결함을 보이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열심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습격에 가담한 것은 포드가 교회보다는 피츠페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줬을 것이며, 이는 대주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포드는 습격 이후 압박을 받아 엘라와의 관계를 자백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주교는 교회의 도덕적 권위에 도전한 고위 귀족 여성에게 굴욕적인 처벌을 내리기 위해 성적 비방을 무기로 사용했다.

아이스너는 "공개적인 굴욕은 오늘날과 먼 과거에 인간에게 증오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굴욕감은 전쟁, 극단주의, 대량 학살의 원동력이 되며, 여기서는 암살의 동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굴욕감은 단기적으로 분노와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폭력에 대한 욕망으로 굳어질 수 있다."

대주교는 1333년에 사망하지만, 엘라 피츠페인은 4년을 더 기다린 후 배신자 존 포드에게 복수를 한다.

그녀는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빠와 다른 동료들을 이용해 세인트 폴 대성당 그늘 아래에서 그를 처형한다.

"포드가 대낮에 군중 앞에서 자행한 공개 처형 방식은 현재 러시아나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 자행되는 정치적 살인과 유사하다. 누가 통제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아이스너는 말한다.

"법치가 약하면 사회 최고위층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이든 7세기 전이든 말이다."

흥미롭게도 아이스너는 엘라와 로버트 피츠페인 사이에는 악감정 흔적이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로버트는 남작이자 초기 의회 의원이자 엘라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

로버트는 1354년에 사망했지만, 엘라와 결혼한 상태였고, 엘라는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아이스너는 이렇게 덧붙였다.

"14세기 영국에서 수도원을 습격하고,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공개적으로 반항하고, 사제 암살을 계획한 여성이다. 엘라 피츠페인은 비범한 인물을 포함하여 여러 면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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