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1차 고려거란전쟁] (1) 뻘짓한 고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1.
반응형

동글뱅이 친 구역이 본래는 여진 땅이었다. 훗날 이른바 강동육주라 해서 고려 영역에 들어오지만, 저쪽에 사는 여진이 거란의 군사 도발에 동원되었기에 실상 그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 캐치가 가장 정확했다. 하지만 고려는 그들의 보고를 개무시했다.

 
편의상 고려거란전쟁을 세 차례 있었다 하지만, 누누이 말했듯이 그것 말고도 두 왕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끝임없이 벌어졌다.

치열한 탐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 서막을 연 것이 널리 알려졌듯이 993년, 고려 성종 12년, 요遼 통화統和 11년에 펼쳐진 제1차 전쟁이라 

이 전쟁이 실은 두 왕조에 모두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거란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자칭 80만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했지만 이는 개뻥이며, 실제 동원한 군사는 절반도 안 된다. 쪽수가 많다 해서 겁박했을 뿐이다. 

다행해 이 전쟁이 이렇다 할 충돌없이 외교협상으로 끝나서 그렇지망정이지 하마터면 고려 국토가 초토화할 뻔 했다. 

우리는 이 조우에서 세 치 혀 서희에 의한 이른바 강동육주 획득을 한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외교협상 결과라고 알지만, 천만에. 이건 결과일 뿐이고 실은 고려는 개뻘짓을 했다. 

이 전쟁은 거란 같은 유민 성향 정복국가가 그렇듯이 언제나 계절로는 겨울이 접어드는 때 음력 10월에 시작했으니, 도작 기반 농경국가나 유목기반 국가나 실상 이때가 농한기 혹은 목축이 쉬는 시절이라 이때를 이용해 군사를 동원하곤 했으니 이에서 거란 역시 한 치 어긋남이 없다. 

거란이 침략할 것이라는 보고는 이미 그해 여름 5월에 고려로 입수된다.

훗날 고려 영토로 완전 편입되는 강동육주 지역은 당시 여진이 차지한 땅이었고, 그런 여진은 당시 거란에 복속된 상태였다.

이 여진이 참말로 묘한데, 이 친구들이야말로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하는 존재라, 그에서는 거란에 붙었다 송에 붙었다 하는 고려의 그것을 능가한다. 

한데 이 훗날의 이른바 강동육주, 그러니깐 고려 기준으로는 서북계西北界에 속하는 여진이 그해 5월 거란이 침습할 것임을 고려에 알려준다. 

○ 여름 5월. 서북계西北界 여진女眞이 보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침입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한 결과 그들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고 여겨 대비를 하지 않았다.(고려사절요)

서희를 그 빛나는 세 치혀로써 상찬하나 서희 또한 저 당시 고려 조정 중요한 위치에 있던 대신으로 그 또한 판단 미쓰에 단단히 일조했다. 

에잇? 설마? 하다가 사정이 일변하기는 다시 석달이 지난 그해 8월이라 

여진이 거란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재차 보고하자 비로소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여러 도에 군마제정사軍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냈다. (상동)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늦었다. 넋놓고 있다가 당했으니 고려로서는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완전한 항복을 해서 목숨을 구걸하거나, 협상을 통해 돌파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이때 서희가 화려하게 등장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