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서당은 어떠해야 하는가?
김태식 연합뉴스
아들놈의 서당 체험
2019년 지금은 신주단지 모시듯 해야 한다는 그 유명한 고3생인 아들 얘기다. 언제쯤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나,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한 살 터울인 그의 이종사촌 동생과 더불어 대략 열흘가량 지방의 어느 서당학교에 인성교육이란 프로그램에 보낸 적이 있다. 집사람이 주동해서 일으킨 ‘사변’이었다. 얼추 5~6년이 흐른 지금, 나는 새삼스레 그때 기억이 떠올라 집사람한테 물어봤다.
“무엇 때문에 애들을 서당에 보냈소?”
대답은 이랬다.
“애가 하도 산만해서, 어딘가 봤더니 서당에 보내면 좋다 해서 그래서 보냈지.”
교육내용이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들놈한테 다시금 물어보고 싶으나, 다시는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듯해서 말조차 꺼내기가 무섭다. 대신 함께 프로그램을 다녀온 그의 사촌동생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이모(집사람)를 참 좋아하는데 말이야, 그 서당 교육을 보낸 것만은 지금도 서운해.”
이 프로그램을 다녀온 직후 아들놈 역시 저와 대단히 흡사한 반응을 보였다. ‘인상적’이긴 했지만, 호응도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농담으로 다시 그런 교육프로그램 보낸다 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이번 대회 혹은 축제를 주최하는 ‘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라든가 혹은 ‘사단법인 갱정유도(更定儒道)’에는 이런 일화가 대단히 외람스러울 수 있지만, 이 친구들한테 그 열흘가량의 서당 체험교육이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과연 서당, 혹은 그 현대적 계승을 표방한 서당 체험 교육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네들의 직접 증언, 나아가 나보다는 훨씬 더 많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집사람 전언을 종합하면, 요컨대 군대식을 방불하는 엄격한 교육 프로그램에 질려 버린 듯했다. 특히 강사진에 대한 반감이 다대했으니, 그네들 말을 빌리면 “할아버지 선생님은 좋았는데, 젊은 선생님이 너무 우리를 괴롭혔다”고 한다. ‘규율’이 대표하는 지나친 간섭 혹은 통제가 수강생 어린이들을 서당을 질려버리게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규율을 어겼다 해서 손을 들게 했다 하고, 체벌까지 있었다 한다.
이 작은 일화를 나는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까닭은 저에서 21세기 서당이 왜 필요한지, 그 수요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에서는 그 수요가 부모, 특히 어머니한테서 발견되지만, 현재도 서당은 유용할 수도 있으며, 특히 학교 교육이 커버할 수 없는 다양한 순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서당의 특징
서당(書堂)이란 글자 그대로는 글을 읽고 배우는 곳이다. 비슷한 시설로 향교나 서원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점은 개인 교습소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서당이라고 별도 시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 것이며, 흔히 훈장으로 일컫는 개인에 의한 강독소에 가깝다.
요즘 내가 읽는 조선시대 일기 중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전기를 살다간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를 보면, 지금의 경북 성주 땅에서 보낸 오랜 기간 유배 생활 면모가 자세하거니와, 이에서는 누가 《논어(論語)》를 배우러 왔다느니, 《고문진보(古文眞寶)》를 가르쳤다느니 하는 흔적이 자주 보이거니와, 이것이 바로 서당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그런가 하면 제법 체제를 갖춘 곳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서당이 여타 교육기관과 다른 점은 변통성 자율성에 있다고 본다.
향교나 서원이라면 흔히 교육시설을 떠올리나, 이곳은 엄연히 공자를 필두로 하는 유교 성인이나, 그 계승을 자처한 뛰어난 학자들의 제향 공간이기도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해 향교나 서원은 교육기관이기에 앞서 제단을 겸한 성소(聖所)였다. 그런 까닭에 향교나 서원은 그 교육 방식이 의례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내가 몹시도 현실을 오독하지 않을까 두렵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창조적 계승을 표방할 우리 시대 서당은 혹 그런 자율성은 잃어버리고, 자칫 향교나 서원의 그것을 답습하지는 않나 하는 우려도 표하고자 한다. 비록 아주 사소한 일화지만, 내 아들과 그의 사촌동생이 경험했다는 그 서당학교는 듣건대 서당이라기보다는 그 교육과정과 엄격한 통제가 향교와 서원에 가깝지 않나 하는 인상을 지울 길 없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단체는 ‘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와 더불어 사단법인 ‘更定儒道’인데, 내가 조금 걸리는 대목이 서당이 과연 ‘儒道’만을 현창하기 위한 곳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조선시대에 국한하면 서당의 중점이 ‘儒道’에 치우쳤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것만인가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는 않다. 앞 《묵재일기》를 보면, 훈장인 이문건을 찾은 학동 혹은 학생들이 배운 것은 꼭 유가 경전만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기로 서당은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에 걸쳐 흥성했다 하지만, 이미 삼국시대에도 존재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강수(强首) 열전을 보면, 태종무열왕 혹은 그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낸 ‘쇠대가리’ 강수는 “중원경(中原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 했으니, 지금의 충주가 고향이라, “마침내 스승을 찾아가 《효경(孝經)》과 《곡례(曲禮)》와 《이아(爾雅)》, 그리고 《문선(文選)》을 읽었다” 했으니, 이것이 동네 훈장 선생한테서 개인 교습을 받았다는 단적이 증거가 되며, 이미 그 시대에 서당이 있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된다. 한데 그가 공부한 것 중에 《효경(孝經)과 《곡례(曲禮)》야 이른바 전형적인 유가 경전이라 할 수 있으나, 《이아(爾雅)》는 공구류 사전이며, 《문선(文選)》은 시문 앤솔로지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중에서도 《문선》이 특히 중요한 바, 이 방대한 시문집에 수록된 글 중에 이른바 유가류에 속하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실은 그와는 하등 관련 없는 실용적인 글이 대다수다.
그가 배운 《효경》과 《곡례(曲禮)》는 조선시대에도 유가 경전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배우는 텍스트 중 하나이기는 하다. 그런 점에서 서당이 유가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교육시설을 겸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대하다. 그가 배웠다는 《이아(爾雅)》는 조선시대로 보면 《천자문(千字文)》에 해당하는 工具類은 不問可知다.
조선시대 서당과 관련해 또 하나 저 강수열전에서 주목할 대목이 《문선》이거니와, 이 《문선》은 그에 수록된 글이 하나같이 명문이기는 하나, 漢代 賦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데다, 무엇보다 그 문장이 어렵기 짝이 없어, 후대에는 시문을 배우는 교재로는 잘 채택되지 아니하니, 중국 본토에서는 《고문관지(古文觀止)》로 급격히 대체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말 이래 서서히 《고문진보》가 그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고문진보》는 그 뿌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중국에서 편찬되었지만, 한반도에서 일대 유행했다고 보면 대과가 없을 뜻하거니와, 더불어 이는 주자성리학의 직접 시원을 이루는 中唐의 정치가요 사상가이며 문학가인 한유(韓愈)에 압도적인 비중을 둔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만하다. 《고문진보》를 배운다 함은 실은 한유를 배운다는 말과 동의어나 같았다.
아무튼 우리는 강수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에 흥성하게 되는 서당이 그 연원이 유구해서 이미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한다. 젊은시절 강수는 신라가 三韓을 一統하기 전이니 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라시대 서당의 다른 사례를 강수보다 대략 한 세대가량 뒤지는 설총(薛聰)에게서도 다시금 확인한다. 강수를 입전한 같은 《삼국사기》 권제 46 열전 제6에는 설총 열전도 있거니와, 그 유명한 승려 원효 아들인 설총은 “성품이 똑똑하고 분명해 배우지 않고서도 도덕과 학술을 알았으며,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해 후학들을 가르쳤으므로[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지금[고려]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주로 받든다”고 했거니와, 이 대목을 서당의 원류처럼 거론하는 것으로 안다. 이에서 관건은 설총이 후생을 가르친 형식 혹은 장소가 국가 교육시설인가, 아니면 개인교습소인가 하는 문제로 대두하거니와, 그 어떤 부문에 해당하느냐에 따라 그의 행태는 조선시대 행태로는 향교 혹은 성균관인지, 서당인지가 결정된다. 다만 전후맥락으로 보아 사설 학원이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그 사례가 무지막지하게 많은 조선시대는 물론이려니와, 그 시원을 이루는 신라시대를 보아도 비록 강수와 설총 두 사례에 그치기는 하지만 서당은 분명 조선시대의 그것이나 마찬가지로 그 교과과정이 일률적이지는 아니했으며, 훈장이나 학생의 필요에 따라 다종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교육시설 혹은 행태와 비교할 때 서당이 지닌 또 다른 특장으로 수요자 중심주의를 꼽을 수 있다. 그에서 시행하는 교육과정은 물론 훈장이 주도권을 쥐기도 했겠지만, 조선시대 사례를 보아도 학생이 요구하는 텍스트 교육이 의외로 많았다는 점을 홀시할 수 없다. 나는 강수가 고향 선생한테서 배웠다는 《문선(文選)》을 선생의 선택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다. 초급자가 소화하기에는 버겁기만 한, 이 방대한 시문 앤솔로지는 선생한테도 부담이었을 것이로대, 그런 난해한 텍스트를 가르칠 실력을 갖춘 훈장이 비록 소경(小京)이기는 하나, 엄연히 지방인 중원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허심하게 보지 않는다. 나는 《문선》이 분명 강수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서당의 이런 장점은 조선시대에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흔히 우리가 서당이라 하면, 수염 허연 훈장 선생이 학동들을 자기 집 별채 같은 데 모아다 놓고는 회초리를 준비해 두고 하늘천 따지 운운하면서 《천자문》을 외게 하는 모습을 연상하겠지만, 그런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도 있었겠지만,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실은 족집게 집중과외 형태가 의외로 많았다. 이런 행태는 자발적인 낙향이나 유배 형태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저명한 학자형 관료들한테서 특히 두드러지거니와, 지역사회 童蒙을 계발하기 위한 자발적 사설 학교를 개창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나는 이런 사례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런 사례가 있다면 이는 교육평등권 구현이라는 점에서 한국사에서는 대서특필되어야 할 사건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연 딴판이라, 타겟형 교육이 이뤄졌다. 타겟형 교육은 훈장보다는 수요자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 수요자가 이런 글을 읽고 싶다 해서 선생을 지정해 찾아오는 형태 말이다.
대안학교로서의 서당
이런 역사와 특징을 지닌 서당이 이 시대에 새삼 호명 중이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라든가 ‘사단법인 갱정유도(更定儒道)’ 역시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대표적인 단체라고 안다. 그 외 전국에 걸쳐 적지 않은 신식 서당이 운영 중인 것으로 안다.
앞서 말했듯이 서당은 그 연원이나 전개과정을 볼 적에 항교나 서원에 견주어 지닌 특장(特長)으로는 무엇보다 자유로움 혹은 자율성에 있다고 본다. 이미 보았듯이 교과과정도 학생이 선택하기도 했으며, 그 운영은 매우 자유로웠다. 바로 이런 특성에서 나는 대안학교, 혹은 대안학교의 대안으로서의 서당의 희망을 본다.
그렇다면 작금의 서당은 과연 이런 특장을 제대로 살리는가?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없지 않다고 나는 본다. 서당이 지닌 자유로움을 혹 스스로 잃어버리지는 않고 있나 하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나는 강수가 공부한 그 서당 이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 서당은 근대식 서양 교육제도가 도입 착근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해 한동안은 아예 종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공교육에 대체한 대안교육 바람이 일면서 역사의 뒤안에 사라져간 서당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보기엔 서당은 결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훈장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선생이라 바뀐다거나 그런 가르침을 받는 일이 사숙(私淑) 등으로 대체되기는 했지만, 그 전통은 결코 단절한 적이 없다고 본다.
서당은 결코 유도(儒道)만을 헌창하기 위한 교육시설은 아니었다. 《천자문》 이나 《고문진보》, 나아가 《문선》을 배우는 일이 모름지기 공맹을 배우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실용성이 강했다. 때로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웠기에 서당이 지닌 선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회가 표방하는 ‘서당, 민족교육의 요람에서 인성예의지국의 미래로’라는 표어 역시 나는 조금은 달리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왜 꼭 인성예의지국이어야 하겠는가? 공부가 신바람인 그런 서당은 될 수 없는가?
유교 혹은 유도 혹은 유학이라 하지만, 이것만 해도 시대별 엄청난 넘나듦이 있어 공자 시대의 그것을 원류로 삼는다 할 적에, 그 계승을 표방한 맹자와 순자는 가는 길이 달랐고, 그에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전한시대 전반기 동중서 시대의 그것은 신비설 참위설 예언술까지 가미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흘러 당대에 이르러 싹을 틔운 성리학이 송대가 되면서 본격 개막한다.
이 주자성리학도 중국 본토에서는 양명학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며, 명청대에 이르러서는 고증학 열풍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렇지만 유독 한반도에서는 고려말에 착근하기 시작한 성리학이 조선시대 절대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일상생활 자체까지 그 도덕윤리로 지배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사정이 다르기는 했지만, 우리가 아는 유교 혹은 유학만 해도 그 시대에 맞는 옷을 끊임없이 갈아입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그 갈아입음을 변용이라 한다. 우리는 흔히 유학이라면 변용에 둔갑하고 개혁에 보수적이라 알지만 그 전개 양상은 전연 딴판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 시대에 그 계승을 표방한 서당 역시 나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고 본다. 인의예의 함양이라 하지만, 그것이 조선시대 주자성리학 시대의 그것이라면 환영받기는 나는 힘들다고 본다. 내 아들과 조카가 그랬듯이 자칫 그런 교육은 서당을 대안학교로서의 새로운 활로 개척에 외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공자 맹자 순자 혹은 주자 어느 누구도 말한 적은 없지만, 유교의 절대 가치인 孝만 해도 조선에서는 그것을 실천하는 한 방안으로 3년간 시묘살이를 고착화했지만, 이 시대에 그것을 실천해야 孝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시묘살이 토대가 된 3년상은 다름 아닌 유학의 비조 공자가 정식화했지만, 이미 그 당대에 제자들한테 비효율성이 공격받기도 했으며, 실제 한나라 때 이르러서는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以日易月制가 채택되어 25일 혹은 27일만에 상복을 벗어버렸다.
이런 점에서 유독 원리주의적 면모를 보인 데가 조선왕조였다. 3년간 시묘살이를 고착화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 기간에는 상주가 고기조차 먹지 못했으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의 서당이 이런 시대 이런 도덕으로서의 복귀라면 나부터 반대한다. 융통성 없는 유학 유교는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서당이 예의범절을 교육하는 학교라고만은 보지 않는다. 예의범절을 교육하는 시설, 그것으로서의 서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하지만 나는 요즘 애들이 예의범절 교육을 따로 받아야 할 정도 과거의 어느 시대에 견주어 버릇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예의범절이 다를 뿐이지, 그 다름을 예의범절의 퇴락으로 볼 수는 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프로그램 운영이 우선이 아닐까 조심히 제안해 본다. 그네들의 예의범절을 인정하고서, 그것을 토대로 하는 프로그램 말이다. 그 주된 교육대상인 어린이들만 해도 그네들은 아이돌에 열광한다. BTS와 트와이스와 레드벨벳과 블랙핑크가 상징하는 아이들 문화를 과감히 서당의 문화로 포섭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어벤져스 시리즈가 대표하는 마블 영화에 열광한다. 그네들이 아이언맨 복장을 하고, 스파이더맨 복면을 쓴다 해서 그것이 그들이 예의범절이 없음을 말해주는 증좌는 아니다. 왜 서당이라 해서 모름지기 《천자문》과 《고문진보》와 붓글씨만을 가르쳐야 하겠는가? 서당에서도 방탄소년단 얘기를 할 수 있고, 아이언맨을 얼마든 논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언제인가 나는 우후죽순과 같이 늘어난 이른바 동양학 고전 강독강좌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천편일률적인 그 구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왜 이런 강독강좌는 모름지기 《맹자》와 《논어》여야 하는지를 물으면서, 《소녀경》은 왜 강독하지 않느냐 물은 적이 있다. 서당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을 표시하고자 한다.
과거 공자가 좌정한 자리엔 대중문화 스타들이 정좌(定座)한다. 그 시대 흐름을 서당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그에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서당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요컨대 서당은 서당이라는 말이 주는 그 갑갑함 혹은 고리타분함을 넘어 신나는 놀이터로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서당
애초 내가 이번 학술대회 발표자로 초대되면서, 비록 ‘가제’이긴 하지만, 주최 측이 배정한 주제는 ‘무형문화재 신법으로 바라보는 서당문화’였다. 주최 측에서 왜 이 주제를 생각했을까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이 논의를 나는 부러 이번 발표문으로 대체했으니 첫째, 이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데다 그것을 다루기엔 시간이 촉박했으며 둘째, 나는 현직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 무형문화재위원이라, 자칫 이해 상충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주제는 부러 피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마냥 피할 수만은 없어, 이와 관련한 간단한 언급을 덧붙이는 것으로써 발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주최 측은 아마도 ‘서당문화’를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자 하는 듯하거니와, 이를 위해 무엇보다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 근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서당문화는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무형문화로 분류될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물론 그 토대가 된 것으로 현재도 제법 ‘원형’의 면모를 유지한 유형유산이 있다면야, ‘문화재’로 등록되거나 ‘사적’과 같은 기념물로 지정될 수도 있겠지만, 서당은 고정한 시설이 아닌 까닭에 그런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무슨 문화재로 ‘공인’을 받으려면 그 방법은 오직 무형문화재가 있을 뿐이다. 그 근거가 되는 법률은 ‘문화재보호법’과 이에서 분파되어 독립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무형문화재법)’ 두 가지가 있다.
우선 후자의 母法인 문화재보호법에는 제2조(정의)에서 ‘문화재’를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ㆍ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ㆍ예술적ㆍ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다음 각 호의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네 가지로 세분하거니와 1. 유형문화재 2. 무형문화재 3. 기념물 4. 민속문화재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무형문화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서 그것을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무형의 문화적 유산 중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가. 전통적 공연ㆍ예술
나. 공예, 미술 등에 관한 전통기술
다. 한의약, 농경ㆍ어로 등에 관한 전통지식
라. 구전 전통 및 표현
마. 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관습
바. 민간신앙 등 사회적 의식(儀式)
사. 전통적 놀이ㆍ축제 및 기예ㆍ무예
이 중에서 서당문화가 과연 어디에 해당할 것인지 단안이 쉽지는 않다. ‘라. 구전 전통 및 표현’ 혹은 ‘마. 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관습’이 개중 가깝지 않을까 하는데, 썩 자신은 없다. 이는 어느 시점에 토대가 구축되었다 해서 그것을 무형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할 때 고민으로 대두하는 문제가 된다.
한데 분류보다 더욱 세심히 우리가 주의가 기울일 대목은 무형문화재 정의 부분이거니와, 무엇보다 무형문화재가 되기 위한 절대의 조건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무형의 문화적 유산”일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여러 세대가 과연 몇 세대 이상인지 누구도 모른다. 이는 무형유산을 애매하게 만드는 측면이기도 하거니와, 반대로 과연 몇 세대 이상이어야 무형유산 조건을 갖추는가를 규정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런 애매모호한 측면은 실은 이를 결정하는 문화재청이나 무형문화재위원회의 판단이 자의적인 요소가 가미될 위험성을 노출하는 창구가 된다.
아무튼 이에 비추어 그렇다면 서당문화가 이에 해당하는가가 심대한 문제로 대두한다. 서당문화는 우리가 잘 알듯이 이 땅에 근대화 산업화 바람이 몰아치면서 한동안 단절됐다고 봐야 한다. 모르겠다. 내가 아는 지식이 짧아서인지 모르나, 서당문화가 일견 명맥을 유지한 데도 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멸실에 가까운 타격을 맛보다가 근래에 와서야 대안학교의 하나로서 부활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이 점으로 본다면 서당문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왔는가를 증명해야 하는 당면 과제가 있다.
그렇다면 무형문화만을 전담해서 다루는 무형문화재법에서는 이런 사정이 어떤가? 이 법률은 문화재보호법이 다루는 범위가 광범위해짐에 따라 관련 업무를 뒷받침하게 위해 2015년 3월 27일에 법률 제13248호로 독립해 나온 것으로 세 차례 일부 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무형문화재법은 문화재보호법에는 전연 보이지 않는 새로운 개념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매우 중대하다. 그 제3조(기본원칙)을 보면 “무형문화재의 보전 및 진흥은 전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며, 다음 각 호의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면서 다음 세 가지를 들었거니와,
1. 민족정체성 함양
2. 전통문화의 계승 및 발전
3. 무형문화재의 가치 구현과 향상
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무형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한데 이에서 ‘전형’이라는 말이 보인다. 전형이란 무엇인가? 이 법 제2조(정의)에서는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고 하면서 전형을 거론하면서 “2. ‘전형(典型)’이란 해당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고 있다.
이 자체만으로는 전형의 의미가 아리송하기만 하다. 실제 이 법률 앞뒤를 뒤져봐도 전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종잡기가 대단히 힘들다. 이 전형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흔히 쓰는 말로서 예컨대 그 사람은 “전형적인 남편(혹은 아내)이다”라는 대화에서 보이는 사례가 그것이다.
무형문화재가 다른 범주에 속한 문화재와 현격히 다른 점이 이 전형이다. 전형은 그 뜻이 애매한만큼 역설적으로 무형문화재에는 그렇지 않은 문화재들에 견주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준다. 예컨대 여타 유형문화재를 보면 ‘원형(原形)’이라는 말을 문화재 가치를 판단하는 절대의 준거로 사용하는 일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무형문화재법에는 ‘원형’이라는 말이 그 어디에도 없다.
이에서 우리는 중요한 시사를 받는데 무형문화재법에서 쓴 ‘전형’이라는 말이 실은 ‘원형’의 상대 개념으로 썼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원형은 작금 문화재 현장에서 문화재를 옥죈다는 비판에 시종 시달리는 묘한 말이다. 우리는 흔히 문화재가 원형을 잃었니, 원형을 유지했느니 하면서, 그 원형을 유지한 쪽에다가 절대적인 문화재 가치를 둔다.
한데, 유형문화재에서 과연 무엇을 원형이라 할 수 있는지, 원형이 있기나 한지 적지 않은 논란이 대두한 실정이다. 예컨대 석굴암의 경우 무엇을 원형이라 할 수 있는가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신라시대 김대성이 처음 완공한 석굴암을 원형이라 하겠지만,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찾을 수도 없다. 나아가 천수백년간 시간을 경과하면서 석굴암은 무수한 변화를 겪었다. 땜질도 했을 터이고 심지어 무너지기도 했고, 시멘트로 바르기도 했다. 그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 시대를 증언하는 원형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형은 해당 문화재별로 딱 하나가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상은 전연 딴판이라 무수한 원형이 존재한다.
그렇게 많은 원형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원형이라 할 것인가? 이는 아무도 결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유형문화재에서는 원형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그러면서도 대개의 경우 해당 문화재가 탄생한 직후의 모습을 원형이라 설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그리하여 그 후대 무수한 변화는 원형을 ‘훼손’하는 일로 간주해 버린다. 이렇게 되니, 문화재는 생장을 멈추어 버리고 어느 한 시점으로 고정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일을 일컬어 문화재의 박제화라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무형문화재 역시 한동안 이런 원형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예컨대 종묘제례악만 해도 지금의 그것이 원형을 훼손했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말하는 원형은 실은 조선말기, 혹은 대한제국기 종묘제례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종묘제례악도 조선 전기 이래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 조선후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변한 종묘제례악이라면 근현대에 와서도 변모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하도 원형을 둔 논란이 많아지니, 적어도 무형문화재에서는 원형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전형’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는 한국문화재 정책사에서 획기적인 발상이다. 전형이라는 말은 굳이 풀어쓴다면 ‘그 정신은 계승하는 창조적 변화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재보호법과 버무려 이 구절을 이해한다면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이 이뤄지면서 변화는 있기는 하지만, 그 정신 혹은 정수만은 계승한 경우”에 무형문화재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고 이해하면 대과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더불어 서당문화는 그것이 혹 문화재로 지정된다면 그런 정수를 계승하는 특정 단체나 개인이 그 ‘보유자’로 지정받을 수 있는 종목은 아님은 명백하다. 이는 이미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가 이뤄진 ‘김치와 김장문화’라든가 ‘장담그기’ 같은 경우가 해당하는데, 한국인이면 누구나 공유하는 이 문화를 특정한 단체를 보유자로 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는 ‘종목’만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다. 서당문화가 이에 해당함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서당문화 부활을 꿈꾸는 분들이라면 그것을 국가지정문화로 공인받고 싶고, 그런 보상을 통해 자부심을 구현하고자 한다는 욕망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그보다 앞서, 무엇보다 이 서당문화가 한국사회 저변에 폭넓게 다시 뿌리를 내려야 하며, 이를 통해 서당문화가 전승할 가치가 있다는 인식을 널리 심어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21세기에 맞는 혁신이 있었으면 한다.
(이상은 2019.05. 04 서울시청사 강당
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주최
'제18회 대한민국서당문화한마당' 행사 국제학술대회 발표문이다.)
'ESSAYS & MISCELLAN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진 봉평비 ‘吉先길선’과 아도비 ‘吉升길승’ (0) | 2019.05.07 |
---|---|
고고학 문화재 행정을 교수한테만 맡겨버린 발굴제도과 (0) | 2019.05.05 |
내게 다음 生이 주어진다면 (0) | 2019.05.01 |
우리가 없는 것들,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 (0) | 2019.04.30 |
기념記念 vs. 찬양讚揚 (0) | 2019.04.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