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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어이없는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사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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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업실, 클로 뤼세 성Château du Clos Lucé



1911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초상화가 도난당하기 전까지는 그 초상화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피렌체에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측근들은 물론, 프랑스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 앙부아즈Amboise 주민들도 물론 그 초상화를 보기는 했다. 

1516년, 64세가 된 레오나르도가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한다.

책과 양피지, 그리고 오늘날 모나리자로 알려진 초상화를 가득 실은 노새를 타고 말이다.

레오나르도를 숭배한 22세 젊은 프랑수아 1세는 그에게 앙부아즈 성 근처 영주 저택 클루Cloux를 주어 죽을 때까지 살게 했다.

왕은 궁정 초상화가들에게 클루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업실에 가서 모나리자를 연구하도록 장려했다. 

앙부아즈 궁정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예로운 손님인 레오나르도를 만나러 갔다.

클로 뤼세 성Château du Clos Lucé



이 초상화는 3년 동안 일반 대중에 전시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 유명한 예술가와 그의 걸작을 보고 싶어 했기에, 레오나르도는 관광 명소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관람은 공개일에 한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519년 레오나르도가 사망하자, 프랑수아 1세는 모나리자를 구입해 파리 근처 퐁텐블로Fontainebleau에 있는 자기 성에 걸었다.

그의 유명한 미술관이 아니라, 자신의 욕실에다 말이다.

그곳에서 이 그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프랑수아 1세 이후 프랑스 어떤 왕도 이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루이 13세는 영국의 찰스 1세한테 심지어 이 그림을 팔지 말지 망설인 일도 있었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발생한 1911년 엽서 속 루브르 박물관



루이 15세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건축 감독관에게 거실에 두도록 했다.[무슨 맥락인지? 맘에 들지 않으면 걷어치우면 되는 일인데 거실? 침실에 두지 않았다는 뜻인가] 

프랑스 혁명 이후 이 그림은 나폴레옹 침실에 보관되다가 1804년 박물관으로 개조된 루브르 궁전에 전시되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은 오늘날의 미술관과는 전혀 달랐다.

가능한 한 많은 그림이 벽에 빽빽하게 걸렸다.

엉성하게 붙지는 않았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의를 끌기 위해 서로 밀치고 있었다. 

1900년대에는 전시가 더욱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보도한 당시 프랑스 한 신문



모나리자는 베로네세Veronese 작품 아래에, 티치아노Titian 작품과 코레조Correggio 작품 사이에,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다른 세 작품 사이에 전시되었다. 

입장은 무료였지만, 주로 학자들과 예술계 인사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1911년 모나리자가 도난당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도난 9일 후 루브르 박물관이 다시 문을 열고 그녀의 얼굴이 전 세계 모든 신문 1면을 장식했을 때, 박물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벽의 빈 공간을 보기 위해 줄을 섰다. 

1911년 8월 22일 화요일 오전 9시, 파리 출신 예술가 루이 베루Louis Béroud는 박물관에 일하러 갔다.

이젤easel을 설치하던 그는 모나리자가 평소 있던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경비원에게 모나리자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경비원은 사진관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빈첸초 페루자



몇 시간 후, 베루가 박물관 관리자 푸파르댕Poupardin 씨한데 그림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푸파르댕 씨는 물건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푸파르댕은 루브르 박물관 관장에게 전보를 보냈고, 관장은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아마 장난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푸파르댕은 부관장 집으로 달려가 보안 책임자에게 연락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폐쇄되었다. 국경도 폐쇄되었다.

출항하는 선박과 기차는 수색을 받았다.

직사각형 소포를 소지한 사람을 심문하라는 지시를 받은 경찰은 초상화를 본 적 없었기에 사본을 받았다. 

수사관들은 서비스 계단service stairs 아래에서 보호 유리와 액자를 발견했다.[서비스 계단이 무엇일까?]

법의학자들은 유리에서 지문을 발견했다.

 

모나리자가 있던 자리



경비원, 큐레이터, 배관공, 석공, 정원사 등 박물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의 인화 사진이 촬영되었다. 

수사가 최근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한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자, 31세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Vincenzo Peruggia는 파리 자택에서 심문을 받았다.

페루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수개월 동안 일한 까닭에 모든 출입구를 알고 있었고, 모나리자가 전시된 유리 액자를 직접 제작하고 수리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집은 수색을 피했다. 

페루자는 가장 가까운 경찰서로 가서 인화 사진을 찍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현청에 두 번이나 소환되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고서는 분실되거나 무시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보안에 대한 공식 조사 결과, 보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소위 경비원들은 벤치에서 낮잠을 자거나 계단에서 용변을 봤다.

많은 방에 경비원이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장은 해고되었다. 

 

빈첸초 페루자



2년 후, 페루자는 파리에서 피렌체의 명망 있는 미술상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을 50만 프랑에 팔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미술상은 냉정하게 대응하며 그림을 피렌체로 가져와 진품 여부를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그런 다음 그는 우피치 미술관 관장에게 연락했다. 

1913년 12월 10일 수요일, 400년 만에 처음으로 모나리자가 피렌체로 돌아왔다. 

1913년 12월 11일 목요일 오후 3시 15분, 트리폴리 호텔Hotel Tripoli 20호실에서 우피치 미술관 관장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의 앞에는 피렌체 출신 가장 유명한 화가의 그 그림 모나리자가 있었고, (중계상일 듯한) 미술관은 이 그림을 한 할머니에게 팔 계획이었다. 

1913년 12월 12일 금요일, 페루자는 체포되었다. 

이 재판은 피렌체에서 열렸다.

 

당시 이미 지문이 도입되었던 듯. 왼쪽은 빈첸초 페루자



그는 자신이 모나리자를 피렌체에 두고 싶어 하는 애국자라고 말했다.

이 전략이 먹혀들어 피렌체 사람들 영웅이 된 그는 불과 7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로 반환되기 전) 모나리자는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관람객 수는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사상 처음으로 수천 명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 걸작을 감상할 기회를 얻었다. 

1913년 12월 30일, 모나리자는 밀라노-파리 열차 침대칸에 옮겨졌다.

다음 날, 파리 리옹 역에서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시의회 의장은 그녀의 귀환을 환영했다. 

페루자는 석방 후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군에 복무했다.

 

1909년 빈첸초 페루자 머그샷


전쟁 후 그는 뻔뻔스럽게 파리로 돌아와 예술가들에게 물감을 파는 가게를 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44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페루자는 1911년에 모나리자를 훔쳤다. 

지난 2년 동안 그 그림은 어디에 있었을까?

파리의 그의 침대 밑에 있었다.

그는 언제 그것을 훔치기로 결심했을까?

1911년, 여러 그림이 훼손되자 루브르 박물관은 많은 예술 작품을 보호 유리 케이스에 보관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당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모나리자는 1914년 1월 파리로 돌아왔다.



유리 장인glazier 페루자는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통치 시절부터 루브르 박물관과 일한 고비에 유리 제작 회사Gobier Glassworks Company와 유리 케이스 제작 및 설치 계약을 했다.

페루자는 박물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에도 작업했다.

동료들이 나폴레옹이 전 세계 예술 작품을 약탈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페루자는 모나리자 또한 약탈된 것이라 착각해 피렌체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그가 직면한 문제는 작업이 완료되어 계약이 종료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1911년 8월 21일 월요일 아침 7시, 모든 박물관 직원에게 지급된 흰색 작업복을 입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는 큰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Vincenzo Peruggia가 걸작을 훔친 동기 중 일부는 민족주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돈도 큰 요인이었다.



갤러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모나리자를 5cm 정도 들어 올려 네 개 철제 걸이에서 떼어낸 후 서비스 계단으로 옮겼다.

그는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선 유리 케이스와 액자를 꺼내고 작업복을 벗고 그림을 그 안에 감쌌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캔버스를 말아 주머니에 넣었다고 잘못 기록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레오나르도는 나무 패널에 모나리자를 그렸다. 

1층에서 페루자는 갇힌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하며 출구 문 손잡이를 풀었다.

마침 박물관 직원이 반대편에서 열쇠로 문을 열고 있었다. 

도난 사건을 둘러싼 대대적인 홍보는 모나리자를 하늘 높이 치솟게 했다.

한 평론가는 그녀가 루브르 박물관에 예술 작품을 남기고 상징적인 작품을 돌려주었다고 말했다. 

매일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3만 명 중 2만 5천 명이 박물관에서 단연코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인 모나리자를 보러 간다. 항상 후손을 생각하는 레오나르도는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이상 아티클은 아래를 옮긴다.

Post by Pamela (BA History of Art). Photography by Mark.
https://photographfrance.com/blog/when-did-the-mona-lisa-become-famous

 

When did the Mona Lisa become famous? — Photograph France

Until 1911, when the portrait of Mona Lisa was stolen from the Louvre in Paris, very few knew anything about it.

photographfran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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