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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16

[귀주대첩] (13) 노복 터진 강감찬 강감찬은 빌빌 쌌다. 948년, 고려 정종定宗 3년에 태어난 그는 빌빌 싸다 서른여섯 중늙은이가 다 된 983년, 성종成宗 2년에야 최승로崔承老가 시험감독관 총대장이 되어 실시한 과거 시험 갑과甲科에 강은천姜殷川이라는 본명으로 등단해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나이에 견주어 출세는 굉장히 늦어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주장하는 조정 대세에 맞서 홀로 몽진을 주장해 관철함으로써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계속 빌빌 쌌다. 이렇다 할 요직을 지낸 적도 없다. 이런 그가 역사의 주역으로 등단하기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전운이 한창 감돌던 그 무렵, 현종은 지난날 몽진, 곧 일단 튀고 보자 전법을 제시한 강감찬을 기억하고는 그를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나아가 서북면을 지키는 총.. 2024. 2. 24.
[귀주대첩] (12) 넘쳐나는 과부와 고아 이른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거란에 준 충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었다. 이 전쟁은 공식으로는 1019년, 개태開泰 8년 2월에 종식되었지만, 그 수습은 그해 내내 계속됐다. 그해 3월, 수뇌진을 처벌한 거란 성종 야율륭서는 그해 6월 무자戊子에는 고려를 정벌할 때 전몰한 장교의 자제들을 조사한 데 이어 그달 을사乙巳에는 남피실군교南皮室軍校 등이 고려를 토벌한 공이 있다 해서 금백金帛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요사 성종본기) 이것으로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같은해 가을 7월 기미己米에는 고려를 정벌하다 전몰한 여러 장수의 처한테 조칙을 내려 봉록을 더해주게끔 한다. (요사 성종본기) 물론 이 전쟁이 참혹한 거란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그들로서는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을 감출.. 2024. 2. 24.
[귀주대첩] (9) “네 낯 가죽을 벗겨 죽이리라” 앞서 봤듯이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냅다 개경을 향해 남하했다. 심지어 서경도 오른편으로 돌린 채 남하했다. 이는 소배압 전술이 현종 사로잡기였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십만 거란군에 견주어 이십만을 동원한 고려군은 전력에 여유가 있었다. 일부는 거란군 꽁무니를 맹렬히 좇아 따라붙어 후미에서 들이쳤다. 강감찬은 그러는 한편 일부 부대는 빼돌려서 개경으로 서둘러 내려가게 했다. (1019년) 봄 정월 경신, 강감찬은 거란 병사들이 도성 가까이에 이르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서둘러 가서 경성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였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또한 병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고려사절요) 소배압은 쏜살같이 달렸다. 1월 3일에 벌써 .. 2024. 2. 23.
[귀주대첩] (8) 거란군 꽁무니를 좇는 이상한 전쟁 소손녕이 이끈 1차엔 80만, 성종이 친정한 2차엔 40만을 동원했다는 거란이 1018년 현종 9년 12월에 단행한 3차엔 고작 10만을 끌고 왔으니 규모로 보아 거란으로서는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이건 다른 측면에서 봐얄 성 싶다. 거란으로서는 이 무렵 내부 사정으로 저 이상 되는 군대를 징발하기 힘들었다고 보거나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십만은 당시로서는 전면전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흔히 이 삼차전을 귀주대첩이라 하나 실상 이 전쟁은 최전방 흥화진에서부터 개경 근방까지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에서 크고작은 전투가 잇따랐으며 실상 귀주대첩은 그 마지막 승리를 말할 뿐이다. 이듬해 2월 1일 귀주대첩까지 3개월에서 약간 모자란 이 기간에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고려는 완승했다. 특히 .. 2024. 2. 23.
[귀주대첩] (7) 전쟁 직전 강감찬의 동태 948년 생인 강감찬은 70세에 도달한 1017년 정월에는 정년 퇴직하거나, 정년퇴직하고 싶다는 사표를 던졌어야 한다. 나는 틀림없이 강감찬이 저 시기에 저랬다고 본다. 그것을 현종은 반려했다. 다만, 사서에서는 누락됐을 뿐이다. 그건 현종으로서도 강감찬을 따로 써 먹을 데가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를 간접 증언하는 흔적이 고려사 현종본기와 고려사절요에 모두 보인다. 한창 전운이 감도는 현종 9년 1018년 5월, 현종은 강감찬을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西京留守內史侍郞平章事로 삼는다. 서경유수 겸 내사시랑평장사다. 서경유수는 외직이고 내사시랑평장사는 내직으로 재상이다. 한데 서경유수를 임명하면서 그 임명장 뒤에다가 현종은 이상한 말을 쓴다. “경술년(1010) 중 외적의 침입[虜塵]이 있게 되자 창과 .. 2024. 2. 22.
김종현金宗鉉, 제3차 고려거란전쟁의 숨은 영웅 김종현金宗鉉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기는 현종 2년 4월 6일 기유라, 고려사 현종본기 해당 항목에 이르기를 황보유의皇甫兪義와 최창崔昌 둘다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고, 유소柳韶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김종현金宗鉉과 박종검朴從儉을 모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런 김종현이 같은 현종본기에 의하면 그 10년 3월 7일 갑자甲子에는 이응보異膺甫가 우복야右僕射로, 강민첨姜民瞻이 응양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 柱國으로, 유참柳參이 예빈경禮賓卿으로 전근한 그날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이름을 다시 드러낸다. 다시 그가 덕종 즉위년 7월 26일 경술에 단행된 인사 명단에 보이니 장극맹蔣劇孟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홍빈洪賓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이유섬李有暹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김종현金宗鉉을 ..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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