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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5

해방이후 국립대와 사립대 필자의 글을 쭉 보신 분들은 이해하겠지만,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그때까지 존재한 모든 관립 공립학교를 싹싹 긁어모아 서울대라는 미국식 종합대학을 하나 간신히 만들어 놓고 실신했다는 표현이 옳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서울대도 실상을 들여다 보면 대학연구실에서 박사까지 마친 교수들이 거의 없어 (경성대 법문학부 전체교수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2명인가 그랬고 나머지는 전부 학사소지자였다. 당시에는 정식대학 졸업한 학사학위 소지자도 조선에는 거의 없어 학사학위 소지자 교수로 채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할 수 있다.) 대학자체가 이름만 번듯하지 완전 부실 대학이었다 하겠다.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 10년간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고등교육기관 증설, 고등교육자 숫자 배가에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렸는데 사실상 1960년대.. 2023. 6. 3.
1987년 왜 거리마다 대학생이 가득했는가 1987년 6월. 거리마다 반정부시위에 나선 대학생이 가득했다. 1980년. 즉각적인 민주화를 외치며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지만, 결과는 우리가 본 바와 같다. 하나는 실패하고 하나는 성공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의 하나는. 아래와 같다. 5공화국 때 대학생 수는 이전보다 두 배가 불었다. 1985년 현재 전국적으로 대학생수가 120만명이었다. 참고로 4.19 때 대학생 수 10만 8천. 한일협정 즈음 대학생 수 13만 5천. 80년 서울의 봄 당시 57만명. 87년 6월 당시 120만명 이상. 이것이 87년 당시 가는 곳 마다 대학생 시위대가 가득했고 "넥타이부대"가 출현한 이유다. 아마 이 시대에 대학생수가 백만명을 넘기고, 대졸자가 "넥타이부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2023. 3. 30.
예고: 대한민국의 50-70년대: 위대한 우골탑의 시대 해방 직후 하급 관리 양성소가 되어 있던 대학 시스템을 물려 받은 한국인들은 어떻게 해서 땡전 한푼 없이 50-70년대, 대학교육을 건설했을까? 이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우골탑의 시대"가 열린다. 2023. 3. 21.
교수 겸직, 이젠 고리 잘라야 한다 〈교수 겸직은 김영란법 정신에도 어긋난다〉 현직 국민대 교수인 김병준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는 국민대 현역교수로서 학교를 휴직하고 참여정부에서 호사를 누리다가 교수로 복귀했다. 이런 교수가 한둘이 아니다. 공직 혹은 그에 준하는 자리를 맡아 현직 교수 신분을 유지한 교수가 천지 빼까리다. 비단 이만이 아니라 상당수 교수가 교수가 본업이 아니라 알바로 여기니, 그런 세태 형성에 저 겸직 허용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나는 교수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를 알바로 여기며 딴 짓거리에 혈안이 된 교수놈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겸직은 김영란법 정신에도 맞지 않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기회균등 차원에서도, 그리고 교육받을 권리 차원에서도 맞지 않는다. 교수는 교수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 2018. 11. 3.
동몽선습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 저작인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 저작이라 했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201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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