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探古의 일필휘지491

젊은 소정小亭, 폭포를 그리다 근대 한국화단에는 숱한 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그림솜씨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는 적고, 또 그 중에서도 처신을 흠잡을 구석이 드문 분은 더욱 적다. 그 적은 사례 중 한 분이 바로 소정 변관식(1899-1976)이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의 제자뻘인 소림 조석진(1853-1920)의 외손으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도기과陶器科에 입학해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를 마친 뒤엔 외할아버지가 간여하던 서화미술회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운다. 1920-30년대 변관식은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작품을 내는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두 차례 특선을 거두면서 기량을 널리 인정받는다. 1925년부터 4년간은 일본에 건너가 고무로 스이.. 2023. 11. 19.
더덕을 자신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저자 서긍 선생님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1091-1153)은 그의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순천관에서 매일 제공하는 반찬[日供食菜]에는 더덕[沙蔘]도 있었다. 그 모양이 크고 부드러워 맛이 있는데, 약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 권23, 풍속2, 토산 중에서 고려 사람들도 더덕을 더덕구이나 더덕무침이나, 뭐 여러 가지로 만들어 반찬으로 먹은 모양이다. 이때는 고추가 없었다. 그러니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잘라서 넓게 펴가지고 고추장 발라 기름 두른 번철에 살짝 구워낸 더덕구이 같은 건 없었겠지만, 더덕 향과 맛은 외려 요즘보다 더 좋았겠다. 그런 더덕을 고려에 있는 동안 날마다 먹었다니 아아! 부러워라 서긍 선생이여. 2023. 11. 19.
八자가 되어 버린 入, 기절초풍할 백운거사 팔폭 병풍 초상의 탄생 후집 권11을 보면, 우리 이규보 선생님이 누가 그려온 초상화를 보고 자찬自贊한 글이 하나 실려있다. 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오십 년 오르락내리락 五紀升沈 구구하게 산 이 한 몸이 區區一身 여덟 폭 비단 가운데 八幅素中 엄연히 비슷한 사람일세 儼然似人 - 후집 권11, 찬, "정이안이 나의 초상화를 그렸기에 스스로 찬을 지어 이르기를[丁而安寫予眞。自作贊曰]" 중에서 그런데....8폭이나 되는 비단에 초상화를 그렸다는 게 과연 정말일까? 어지간한 불화 크기 바탕에 그렸단 이야기인데, 뭐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 설마 8폭 병풍에다 그렸다는 말일까? 같은 글이 조선 초기에 편집된 에도 실렸는데, 거기선 이렇게 나온다. 오십 년 오르락내리락 五紀升沈 구구하게 산 이 한 몸이 區區一身 한 폭 .. 2023. 11. 16.
이규보가 백운거사라 칭하게 된 사연 백운거사白雲居士는 선생이 스스로 지은 호이니, 그 이름을 숨기고 그 호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이렇게 호를 짓게 된 뜻은 선생의 에 자세히 실려있다. 집에는 자주 식량이 떨어져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거사는 스스로 유쾌히 지냈다. 성격이 소탈하여 단속할 줄을 모르며, 우주를 좁게 여겼다. 항상 술을 마시고 스스로 혼미하였다. 초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반갑게 나가서 잔뜩 취해가지고 돌아왔으니, 아마도 옛적 도연명陶淵明의 무리리라.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이렇게 세월을 보냈으며, 이처럼 그것을 기록하였다. 거사는 취하면 시를 읊으며 스스로 전傳을 짓고 스스로 찬贊을 지었다. 그 찬에 이르기를, 뜻이 본래 천지의 밖에 있으니 하늘과 땅도 얽매지 못하리라 장차 원기元氣의 근원과 더불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 2023. 11. 15.
그냥 와, 다 받아줄께 떨어지고 남은 매실 그 열매가 일곱일세 나를 찾는 뭇 남자들 길일만 고르면 된다네 떨어지고 남은 매실 그 열매가 셋이라네 나를 찾는 뭇 남자들 오늘 당장 와도 된다네 떨어지고 남은 매실 광주리 가득 채웠다네 나를 찾는 뭇 남자들 말만 하면 된다네 ㅡ 《시경詩經》, , 소남召南, "떨어지고 남은 매실(표유매摽有梅)" 2023. 11. 12.
한달치 봉급으로 장욱진 그림을 산 김원룡 이 작품을 포장하며 장욱진 화백은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김원용씨는 이제 한달동안 무얼 먹고 사나?" *** Editor's Note *** 김원룡은 1세대 고고학도 겸 미술사학자로 국립박물관에 봉직하다 1961년인가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자 그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한동안 혼자 교수였고 신생인 데다 인기가 없는 학과라 매양 신입생 모집 때마다 미달 사태가 나서 괴로워했다. 이후 잠깐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땐 교수가 봉급으로 생활할 때가 아니었다. 삼불이라는 호를 쓴 그는 각종 정부 위원을 독식했고 각종 회의에 참석했다. 지금도 각종 회의에 불려다니며 짭짤한 수입을 내는 고고학 교수가 더러 있다. 아마 그 수당이 봉급에 육박할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장욱진 걱정과는 달리 적어.. 2023. 11. 1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