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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118

북한, 탈북자: 몇개의 단상 최근 북한과 탈북자를 보고 드는 생각을 써 본다. 1. 언젠가 북한의 역사를 유심히 보면 조선을 이해할 단초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썼다. 북한에서 배급제가 무너지고 장마당 경제가 일어나는 과정은 아마도 조선 전기의 과전법 체제가 붕괴하고 시장경제의 맹아가 분출하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경우 조선 못지 않은 폐쇄 경제이므로 지금 북한이 도달한 장마당 경제 수준이 조선시대 시장경제 모습을 상당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농업에 기반하고 딱히 뭐 경쟁력 있는 산업이 없는 상태에서 바깥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동맹 없이 고립되어 버리면 도달할 수 있는 "시장경제" 모습은 딱 지금 북한 정도가 최고점이라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이 최고점에 거의 근사하게 도달.. 2023. 3. 20.
오늘 글의 보유: 해방직후 서울대의 상황 필자가 쓴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해방직후 서울대는 제대로 된 대학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서울대가 경성제대 후신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서울대에 경성제대의 교원과 연구, 교육전통이 해방이후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해방이후 경성제대는 완전히 빈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집으로 이주해 들어간 조선인 교수들은 출신 배경도 다양했다. 이들이 당시 조선에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적자원 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경성제대가 해방이후 문을 닫게 되었을 당시, 이 대학에는 불과 한달전에 조교수로 임명된 조선인 교수가 딱 한 명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로 서울대 교수로 들어간 분들은 출신 배경이 정말 다양해서, 의대의 경우에는 경성의전, 경성여의전, 세브란스의전, .. 2023. 3. 19.
대한민국의 50-70년대 (4): 해방과 함께 텅빈 경성제대 의학부 앞에서 해방 직후 상황 두 가지를 설명하였다. 하나는 일반 국민들의 문맹률. 무려 네 명 중 세 명이 문맹 상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 좀 배웠다는 식자층은 달랐느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선 반도 내에는 대학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랐고 이 때문에 30년대 부터는 아예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조선인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일본 유학생 수가 급증하는 것은 일차적인 원인은 조선 내에 쓸 만한 대학이 별로 없다는 데 있었다 할 수 있다. 경성제대는 이때 이미 있었지만, TO가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누어 뽑았고 입학생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당시 조선에 살던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대적 비율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왜곡된 구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경성제대를 나와 봐야 어차피 .. 2023. 3. 19.
대한민국의 50-70년대 (3): 해방 직전 조선인 인텔리 상황 일전 글에서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구한국 공무원들이 조선총독부 관할 하급 공무원으로 대거 편입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소위 칙임관, 요즘으로 치면 고급공무원 군에는 일제시대 내내 조선인은 거의 없었고, 조선인 관료는 대개 말단을 전전했다. 요즘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다고 욕을 먹는 당시 관료 대부분의 직급이 말단인 이유다. 이런 상황은 대학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해방직전 조선에는 잘 알다시피 대학이라고는 경성제대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전문학교" 였는데, 이때문에 고급관료나 학자를 양성할수 있는 TO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애초에 45년 당시까지 문맹자가 절대 다수인 상황에서 이를 뚫고 최고학부까지 졸업해도 "학사"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숫자가 극히 적었다는 말이다. 의대의 경우, 경.. 2023. 3. 18.
대한민국의 50-70년대 (2): 해방직후 문맹률 한국인이 일제시대를 어떻게 경과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그 시대의 경제성장률이 아니라 해방직후 문맹률이다. 경제성장률 등 지표는 "한국의 근대화"의 지표가 될 수 없다. 한국인이 제국의 2등시민으로 격하되고 일본인이 한반도 안에서도 절대우위를 점하는 상황에서 경제성장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보다는 두 가지 지표를 봐야 한다. 첫째는 문맹률. 두 번째는 토지소유관계다. 이 두 가지가 각종 성장률 지표보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데 있어 훨씬 정확하다. 그 중에 첫 번째 문맹률을 보자. 해방직후 한국인 문맹률이 얼마였을 것 같은가? 일제시대가 시작되고도 20년이 지난 1930년 시점의 조선인 전체 문맹률은 73.95%였다. https://db.history.go.kr/download.do?level.. 2023. 3. 18.
대한민국 50-70년대의 추억: 기초의학의 경우 (1) 앞서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에서는 해부학교실에 대한 전시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이번 전시회는 촛점을 50-70년대에 맞춘다. 이 시기는 우리 사학계에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시대다. 50-70년대 전반부는 이승만 정권 시대에 극빈에 시달려야 했고, 60년대 이후는 전례 없는 고도성장기로 오늘날 한국 경제적 부의 기틀을 닦았지만, 두 시대 모두 민주주의가 결함되어 있던 시대로 엄중한 비판을 받았다. 이런 비판은 당연한 것이지만, 50-70년대는 그것만으로 설명하고 치워버려야 하는 간단한 시대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자꾸 제기되는 배경에는 50-70년대 대한민국사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한 몫 한다. 필자의 직장 이야기 몇 토막을 이..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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