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118 우골탑의 전설 흔히 한국인의 교육열을 상징하는 전설적 표현의 하나인 이른바 "우골탑"은 한국사의 유구한 전통과 함께 하는 뿌리 깊은 현상이라 볼지 모르겠지만, "우골탑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우골탑이라는 것이 결국 농사를 짓는 부모들이 소 판 돈으로 그 자제들을 대학에 보내 신분상승을 꿈꾸는 바로 그런 행동을 의미하는 것일진데, 이런 농촌의 소팔아 아이 가르치는 우골탑 전통은 일제시대에는 없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단 소 팔아 아이를 가르쳐 출세케 할 수 있다는 동기 자체가 해방 이후처럼 강하지 않았고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소학교 2-3년 보내고 그만두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필자는 본다) 시골 농부들도 소 팔아 대학을 보낼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우골탑 전설이 처음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 2023. 3. 23. 50대 후반에서 바라본 인생 20, 30, 40대때 생각한 50대 후반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 특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업 모든 부분이 이전과는 묘하게 달라진다. 60대가 되면 아마 더 다르겠지. 예전에는 영화에서 세상을 뜨는 분들이 이제 지쳤다 쉬고 싶다는 멘트를 하며 눈을 감는 장면을 보면 이해를 못했는데, 세월이 아주 더 흐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더 이상 글 쓰기를 포기하는 때가 필요한 논리와 시의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다 지나간 이야기를 지리멸렬하게 하기 시작할 때가 될 텐데, 그때 되면 과연 내 글이 그렇게 퇴락하였다는 걸 내가 알고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논문이라고 쓴 글이 논문도 아닌 글로 바뀐다 싶으면 내게 반드시 이야기해주길. 누구라도. 나는 책 읽고 글쓰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낙인 사람이.. 2023. 3. 22. 예고: 대한민국의 50-70년대: 위대한 우골탑의 시대 해방 직후 하급 관리 양성소가 되어 있던 대학 시스템을 물려 받은 한국인들은 어떻게 해서 땡전 한푼 없이 50-70년대, 대학교육을 건설했을까? 이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우골탑의 시대"가 열린다. 2023. 3. 21. 보유: 기본적으로 큰 오류가 없던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교육 정책 오늘 글의 보유를 쓴다. 앞에서 국대안 파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본편에서도 썼지만, 필자의 이에 대한 입장은 분명하다. 국대안 파동으로 비록 얼룩졌지만, 국대안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신생독립국으로서 가용한 재원을 박박 긁어모아 제대로 된 학사위를 줄 수 있는 국립종합대를 하나 만들자는데 그걸 반대하면 다른 대안은 있는가? 결정 과정에서의 미군정의 독단. 이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정책 자체의 내용에 대한 부분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국대안 파동 당시 소위 우리나라 "국립대학" 교수 중에 해방 전부터 그 대학 교수였던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들 때문에 밀려 있다가 해방 이후 비로소 교수가 된 분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인재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2023. 3. 21. 대한민국의 50-70년대 (6): 국대안 파동 (2) 국대안 파동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서칭만 해도 다 나오기 때문에 많이 적지 않겠다. 여기서는 국대안 파동 진행과정에 대한 약간 언급과 함께 그 결과만 다루고자 한다. 1. 국대안파동은 미군정 당국의 목적도 그러했고 최종 결과물도 어디까지나 "미국식 교육제도에 입각한 종합대학" 건설이었다. 당시 경성제대와 국공립 전문학교는 전공별로 산재하였는데, 해방 이전에도 일본인 교수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인 교수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긴급 충원된 조선인 교수로 급조한 전문학교가 전공별로 산재해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미군정 당국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옳다. 특히 미군정의 최종 목표는 일제하 전형적인 식민지 교육 형태를 띤 조선 교육을 미국식 6-3-3-4제를 도입하고 최종학부인 대학.. 2023. 3. 21. 대한민국의 50-70년대 (5): 국대안 파동 (1) 국대안 파동이라는 것이 해방 직후에 있었는데 여기 관심 없는 분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이 사건은 해방이후 남북분단, 좌우대립에 촉매제 역할을 한 사건인데, 대학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요약하면 이렇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종전의 한국 내 대학과 전문학교를 묶어 "국립서울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대학이라 해 봐야 해방 이전의 경성제대-해방이후 경성대 딱 하나였고, 나머지 국립 전문학교는 각 분야별로 있었는데 이를 모두 단과대학별로 해체모여 하여 "국립서울대"라는 단일 체제로 정리하겠다는 것이어었다. 이 국대안파동은 현재 사학계에서 내린 평가가 필자가 보는 한 별로 공정하지 않다. 일단 남북분단 책임을 미국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은연중 투영되어 있는 저작이 많고, 국대안 파동이 미군정.. 2023. 3. 20. 이전 1 ··· 273 274 275 276 277 278 279 ··· 35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