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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2287

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4] 태胎를 목에 두르고 태어난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충남 서산瑞山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普願寺址에는 법인국사탑法印國師塔碑이라는 고려 초기 비석이 있으니, 고려 초기 화엄종 승려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900~975)의 생애와 업적을 새긴 것이다.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는 물론이고 그 업적을 기술한 부분이자 몸통에 해당하는 비신을 완비된 비석으로 비신 전면 아래쪽이 약간 훼손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보존상태가 좋다. 그 곁에는 당연히 그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있다.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글씨는 한윤韓允이 쓰고 김승렴金承廉이 새겨 그의 입적 후 3년 뒤인 고려 경종 3년, 서기 978년에 세웠다. 내용은 법인이 화엄을 배우고 태조가 시행한 승과를 주관하고 기도하여 광종을 낳게 했으며 재해에 반야를 강설하여 물리치기도 하고 화엄경을 사경하여.. 2024. 4. 2.
고려가 왕건을 기억하는 다섯 번째 방식 일전에 나는 고려 왕조가 그 건국주 태조 왕건을 기억하며 추숭하는 방식으로 다음 네 가지를 들었거니와 첫째 종묘 신주 안치 둘째 어진 봉안 셋째 소상 제작 넷째 현릉 배알 하나를 보강해야 한다. 물론 더 있겠지만, 그런 까닭에 더욱 보강해야겠지만 내가 하나 놓친 대목이 있으니 다섯째 태실胎室 이다. 내가 괜히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순화 4년명 청자 항아리를 태항아리라 했겠는가? 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3] 이대박물관 왕건 청자는 그의 태항아리 2024. 4. 2.
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3] 이대박물관 왕건 청자는 그의 태항아리 청자 순화 4년명 호 靑磁淳和四年銘壺, 죽은 왕건을 위한 봉헌물 청자 순화 4년명 호 靑磁淳和四年銘壺, 죽은 왕건을 위한 봉헌물 청자 순화 4년명 호 靑磁淳和四年銘壺 Jar with Inscription of "4th Year of Sunwha". Celadon 국보 제326호 National Treasure No.326 고려 993년 Goryeo 993 보물이었다가 2019년 5월 2일 국보로 승격했다. 이화여대박물관 historylibrary.net 골동상이 가져와 구입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국보 청자 골동상이 가져와 구입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국보 청자 1946년 4월 1일, 인천시립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만 27세에 그 초대 관장으로 복무한 이경성은 1954년 3월 31일, 36세에 그곳을 사임하고.. 2024. 4. 1.
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2] 모든 왕이 전국 각지에 만든 태실 태조 왕건이 태실을 조성했으므로, 이후 왕들 역시 자동빵으로 적절한 데를 골라 태실을 만들었을 것임은 불문해도 가지하다. 다만 그런 흔적이 몇 남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그런 편린이 있으니 고려사 지리2 경상도 안동부 기양현을 보면 명종明宗 2년(1172)에 태자의 태胎를 묻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 태실이 개성에서 아주 먼 안동에 만들었음을 보며 같은 지리地理1 양광도 안남도호부 수주 김포현金浦縣을 보면 신종神宗 원년(1198)에 왕의 태胎를 이곳에 묻게 되어 김포현으로 승격했다 해서 같은 양상을 보이며 같은 지리3 서해도 평주 동주에는 이곳을 원종元宗(재위 1259~1274)이다. 시대에 왕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해서 서흥현령관.. 2024. 4. 1.
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1] 태조 왕건의 태실 1. 고려 태실은 왜 중요한가? 한반도 태실 문화 전통을 논할 때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해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삼국시대 사례는 충북 진천 태령산의 김유신 태실이다. 이 태실은 이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그런 사실을 대서특필했다는 점에서 삼국시대에 안태安胎 장태藏胎 문화와 관련해 역시 대서특필해야 한다. 다만 통일신라 이전 태실 문화를 엿볼 만한 자료로는 거의 유일한 데다가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도 아니어서 여러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하나 이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김유신 태실 그 자체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러한 사실을 김부식이 대서특필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김부식 시대에는 태실 문화가 확실히 인지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더불어 실물자료로써 현재까지 가장 확실한 태실은 놀랍게도 김유.. 2024. 4. 1.
고려 이전 태실은 왜 개무시되었는가? 첫째 사례 빈곤이라 신라 이전 태실은 오직 김유신 사례 하나만 보고됐을 뿐이니 이 김유신 태실만 해도 삼국사기 그의 열전에 저록되기는 했지만 워낙 평지돌출인 까닭에 그 존재 자체 실존 자체까지 내심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기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서 이것이 태실이라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태실은 더욱더 그 중대성에 견주어 그런 실물자료가 많이 남은 조선시대 위주로 논의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마왕퇴 백서에 대한 개무시도 저와 같은 경향에 기름을 부었으니 나는 이 태실 전통이 중국대륙 남쪽 장강 문화권에서 비롯하고 그것을 중심 혹은 일부 지역으로 포함하는 기원전후 무렵 동아시아 문화권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함을 틈나는대로 역설하거니와 이 문화권은 중국 남부와 한반도 남부 그리고 일본열도 중남부를 .. 202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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