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375 한국에 도교가 없다?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묻기를,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道敎)가 병행하고 있으나 도교가 더욱 성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는 비록 성하나 도교는 전무한 형편이다. 만약 두 개의 교가 병행한다면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한데 장차 어찌 견디겠는가.” 한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소격서(昭格署)와 마니산(磨尼山) 참성(塹城)에서 지내는 초제(醮祭)같은 것은 곧 도가의 일종이다. 서울과 지방을 통하여 항간에서 도가의 복식을 입고 도가의 말을 하는 사람은 없으나, 사대부 집에서 매년 정월에 복을 빌고, 집을 짓고 수리하는 일에 재앙을 제거하려고 비는데도, 반드시 맹인 5ㆍ6ㆍ7명을 써서 경(經)을 읽는데, 그 축원하는 바가 모두 성수(星宿.. 2018. 2. 19. 불알을 공격하라! 적에게 함부로 보이지 말아야 할 것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무절공(武節公) 신유정(辛有定)이 일찍이 왜적을 맞아 여러 번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꿇어앉히고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무절공은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낭신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기니, 적이 땅에 엎어지는 것을 칼을 빼어 목을 베었다. 당시에 그를 맹장이라 일컬었는데, 뒤에 병사(兵使)가 되어 변방을 진압하니 용맹과 공업(功業)으로 저명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너무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심하게 꾸짖은 뒤에야 끝맺었다. 辛武節公有定嘗遇倭賊。賊將跪而斬之。武節見賊兩脚間腎囊嚲下。猝以手拉之。賊踣地。抽劍斬之。時稱猛將。後杖鉞鎭邊。以武烈著稱。然性大急。見人不可。必極口怒罵而後止。孫文僖公碩祖每曰。鑑祖.. 2018. 2. 19. 남수문南秀文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직후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니,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 성과라, 다만 절요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후자의 절록이라 생각하기 쉽고, 실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나, 세밀히 살피면 둘은 별도 별개 사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거니와, 그 이유를 편찬진이 다른 점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2018. 2. 19. 관기官妓 유지를 외친 허조를 위한 변명 성현成俔(1439∼1504)의 필기잡록 《용재총화慵齋叢話》 卷之九에 수록된 일화 중 하나다. 허문경공(許文敬公)은 조심성이 많고 엄격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자제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면 (큰아들인) 후(詡)와 (둘째아들인)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겠소”라고 했다. 이때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서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공에게 이 말이 미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논박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2018. 2. 18. 신랑감은 역시 힘이 있어야? 처녀가 고른 남자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 제6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에 한 처녀가 있어 중매하는 사람이 많았으니, 개중 어떤 이는 신랑감이 문장을 잘한다 하고, 어떤 이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다 하며, 어떤 이는 못 아래 좋은 논이 수십 경頃 있다 하며, 또 어떤 이는 신랑감이 정력[陽道]이 장성壯盛하여 거시기에다가 돌을 담은 주머니를 걸어놓고는 흔들어서 머리를 넘긴다고 했다. 처녀가 시를 지어 그의 의사를 표시했다. “문장이 활발하면 노고가 많고 활쏘기 말타기 잘하면 전사하기 쉽고 못 아래 논은 홍수나면 쓸려가기 쉽고돌주머니 머리 넘긴다니 내맘에 쏙 드네” 2018. 2. 16. 수릉壽陵, 자기가 만든 자기 무덤 2017년 2월, 경주 傳 황복사지 인근을 발굴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미완성 왕릉을 발굴했다면서, 그 성격을 가릉(假陵)이라 규정한 조사성과를 공개했다. 보통 제왕이 자기가 죽어 묻힐 곳으로 생전에 미리 만든 무덤을 수릉壽陵이라 하는데, 그런 용어가 싫다 해서 가릉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아마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는 가묘假墓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데, 그것이 왕릉에 대한 버전이 가릉일 것이므로, 그 명칭이 가릉이건 가묘건, 임시 무덤을 말한다는 점에서 저 용어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분명 조사단에서는 저 무덤이 만들다가 어찌된 이유로 중단하고 폐기한 왕릉이라 해서 저리 이름을 붙였지만, ‘미완성 왕릉’이라 하는 편이 훨씬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전.. 2018. 2. 11. 이전 1 ··· 392 393 394 395 39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