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2824 고대 토양 DNA가 5,000년 된 숯 의학 실체를 밝히다 터키 동굴에서 DNA 분석을 통해 선사 시대 사람들이 5,000년 전부터 소화기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숯 기반 치료법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동시에 항생제 내성 유전자antibiotic resistance genes가 현대 의약품이 개발되기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음을 밝혀냈다.터키 종굴다크Zonguldak 주 이뇌뉘 동굴İnönü Cave에서 발견된 이 획기적인 발견은 고대 의학과 미생물 진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최근 PLoS ONE에 게재된 이 연구는 터키 최초의 대규모 고대 DNA 토양 연구 중 하나다.존굴다크 뷜렌트 에제비트 대학Zonguldak Bülent Ecevit University 과학자들이 최첨단 메타게놈 시퀀싱metagenomic sequencing을 사.. 2025. 9. 16. 18세기 노비를 직시해야 한다 요즘 인터넷 보면 18세기 노비는 사기라던가 그게 아니라 그때 노비는 머슴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보는데18세기에는 전국민 절반 이상이 노비가 맞다. 조선시대 호적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기 때문에역사를 그렇게 왜곡해서는 안 된다. 흔히 한국인들 스스로가 하는 말 있지 않는가,역사를 잊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던가. 이 경우가 딱 그렇다. 18세기 노비를 이해해야19세기 유학 모칭자들이 여는 새로운 시대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19세기의 그 자칭 "잔반"들은 잔반이 아니다. 몰락양반?19세기에는 몰락양반보다 더 많은 사람이 평민에서 노비에서 유학으로 올라와 았었다. 19세기의 많은 유학, 그 사람들은 원래 양반 후손이 아니라 대부분 평민, 아니 더 많은 수가 노비의 후손이었다. 19세기에.. 2025. 9. 16. 금계랍-키니네 광고 20년대 신문 광고를 보면국내산 광고가 거의 없다. 대부분 해외 수입품으로 미국 쪽에서 실어온 박래품이거나 일본산 공산품이 많은 것을 보면당시 조선의 척박한 산업기반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점까지도 조선에서 내다 팔 것은 쌀밖에 없었던 셈이다. 위 광고는 약수입상의 광고인데, 금계랍과 각종 피부병 치료제를 팔고 있다. 금계랍은 키니네, 말라리아 약이다. 오늘날에는 열대지역 말라리아 감염이 우려되는 지역으로 여행하는 분들에게 사전 복용시킨다. 이 광고를 보면 키니네, 금계랍은 만병통치약이다. 학질 말고도 열병에는 다 복용하며 매일 조금씩 복용하면 보약으로도 쓸 수 있단다. 그러니 좀 비싼 듯 해도 집집마다 한 병씩 사두란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도 학질이 정말 많은 나라라 열이 날만 하면 금계랍을 먹으.. 2025. 9. 15. 고대 이집트 구리 제련 작업장 남부 시나이서 발굴 이집트 고고학 탐사대가 남부 시나이 와디 엘-나사브 유적Wadi El-Nasab에서 구리 제련 작업장 copper smelting workshop, 행정 건물, 관측소 등을 발굴하여 고대 이집트 광산업의 규모와 조직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다고 이집트 언론이 최근 보도했다. 고대 이집트 최고유물위원회Supreme Council of Antiquities (SCA)에 따르면, 오랫동안 구리와 터키석turquoise 주요 산지로 알려진 이 유적은 고왕국 시대부터 후기 시대까지 활발하게 채굴되었으며, 특히 신왕국 시대에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SCA 사무총장 모하메드 이스마일 칼레드Mohamed Ismail Khaled는 "발굴된 작업장,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구리 주괴ingots, 그리고 송풍구.. 2025. 9. 15. 20년대, 여러 명이 말하던 민족개조론 춘원은 30년대 말의 행보로이전까지 소급해서 욕을 먹고 있는 측면이 강한 듯 한데,사실 춘원이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당시 (1922년)이 주장을 한 사람은 춘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있었음은 당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예 특집기사를 만들어 여러 명이 연재하거나 아니면 외국인에게 한국인의 결점, 고칠점을 이야기해 달라 하여그것을 정초의 신년 기사로 싣거나 하기도 했다. 이런 경향이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꽤 보인다. 아마 춘원처럼 30년대에 변절의 혐의가 생겼다면이 사람들도 덩달아 모두 소급하여 욕을 먹었을 것이로되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양반들은 대개 춘원처럼 인생 마무리를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신문 사회면은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운동하는 이들이.. 2025. 9. 15. 문인으로 생활하는 춘원 1925년의 신문을 보면 춘원은 명백히 문인으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날짜 신문 하나만 보아도 영대靈臺라는 동인지에 그의 글이 실려 있고, 동아일보에 소설도 하나 연재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재생"작자가 "장백산인"으로 되어 있지만 이건 춘원이다. 장백산인이란 백두산인이라는 뜻이다. 이 소설 삽화를 그린 안석주는 KAPF 소속 예술가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사가다. 당초 이 양반이 작사를 할 때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노래를 작곡. 이 시기는 춘원이 이미 "민족개조론" (1922년)을 발표한 뒤라 이전과는 정치적 행보를 달리 할 때였다. 2025. 9. 15. 이전 1 ··· 301 302 303 304 305 306 307 ··· 380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