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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사진 없는 미라 이야기 필자는 미라에 대한 연구 작업을 지난 20년간 해 왔는데항상 미라에 대한 보도와 대중의 관심이이에 대한 엽기적 뉴스로만 쏠려 있는 것이 안타까왔다. 이전 포스팅에도 썼지만 필자와 김단장이 함께 집필하는 이번 책에는 미라 사진을 최소화한 미라 이야기로 꾸며보고자 한다. 이런 책은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라 관련 서적 중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가장 가까이 간 책이 언젠가 소개했던 바로 아래 책인데,   이 책에는 표지 사진 외에는 거의 미라 사진이 들어가 있지 않고 사람 이야기, 이를 연구하는 사람 이야기, 그 사회와 문화 이야기만으로 채워져 있다. 필자가 항상 생각해 온 것은미라 사진이 미라에 대한 연구와 그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다. 미라 사진은 마치 매운맛 음식과 같아 갈수록..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4): 즉신성불의 종말 메이지 정부는 유신 이후 신불분리령을 통해이전에는 불교와 뒤섞여 있던 신도를 분리하여 별도의 종교시설화 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슈겐도는 여기서 신도의 일종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슈겐도는 너무 불교 쪽으로 깊이 침투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단 슈겐도는 전통 신도의 이론적 배경이라 할 고사기 등 문헌에 전혀 나오지 않는 데다가 슈겐도 자체가 불교 천태종과 밀교진언종 등에 깊이 결합되어 신도로 분리해 내기 용이하지 않았던 점,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들자면, 슈겐도의 행자들이 즉신성불을 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겠다. 메이지 정부는 유신 이후 가장 문제가 서구 제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본에서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는 명분은일본의.. 2025. 1. 26.
김유신을 전면에 끌어올린 학술대회[1] 돈과 조직 이것도 한 시대 편린으로서, 그리고 김태식 궤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정리해두어야겠다. 보다시피 2007년 10월 19일 금요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신라사학회와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가 주최하는 '흥무대왕 김유신, 새로운 해석'을 주제로 내건 학술대회가 열렸거니와 이때는 김창겸과 김태식의 전성시대였으며, 이네가 주축이 되어 조직한 신라사학회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신라사 전문 연구를 표방한 신라사학회가 김유신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문제적 인물이었으니, 그런 말만 무성하다가 결국 신라사학회가 칼을 빼들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이 학술대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창겸형이랑 누가 그리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런 역할 분배가 이뤄졌으니, 형은 조직과 사람 끌어오기를 했고, 나는..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번외 8): 문명개화와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개화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일본사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몰아닥친 급격한 근대화론을 의미한다. 이 사상에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일본 만엔짜리 지폐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다.  후쿠자와 집안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하급무사로서사무라이 계급이라 해도 매우 한미한 집안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후쿠자와 햐쿠스케(百助)라는 인물로 번의 회계를 보조하는 한미한 직역을 담당하는 하급번 관리였는데 (사실 이런 직역은 한국사에서는 아전이나 다름 없다)단순히 하급무사-번리였던 것만이 아니라 유학으로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후쿠자와가 속한 번은 워낙 신분차별이 엄격하여 아무리 학문적 명망이 높아도 도통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 일생을 전전하다..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번외 7): 녹명관鹿鳴館시대 일본 메이지 시대에 지은 건물로 녹명관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어로는 로쿠메이칸이라 읽는다. 에도성에서 도쿠가와가 쫒겨 난 후 덴노가 쿄토에서 쇼군이 살던 성으로 옮겨 앉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일본 황거(皇居, 고쿄)이다. 일본은 개항이후 서구 제국들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있었는데 1880년대까지도 여전히 그러했다.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개입한 청일전쟁 시기까지도 여전히 서양 세력과는 불평등조약이었고이 조약은 최종적으로 러일전쟁 이후가 되어서야 완전히 개정되어 사라졌다. 아무튼 1880년대에 일본은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해 일본이 서양 못지 않은 문명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덴노가 사는 동경의 궁성 옆에 외국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서양식 건물을 짓는데이것이 바로 녹명관, 로쿠메이칸이다. 녹명관을 기점으..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3): 신불분리와 슈겐도의 수난 폐불운동은 사실 일본만이 아니라 동양사에서 여러 차례가 있었다.중국에서도 전국적으로 광풍이 몰아친 유명한 폐불운동이 두어 차례 있었고, 한국도 조선왕조의 건국 자체가 일종의 폐불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불교전래 후 불교의 재래종교에 대한 우위가 결정되면서오랫동안 불교를 주, 토착신앙을 종으로 하는 신불습합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에도시대 국학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후, 결국 신정부는 신도와 불교를 나누어 구분하는 신불분리神仏分離 정책을 선언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신사와 불교사원의 모습은 따라서 메이지유신 이후에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메이지신정부는 불교와 신도가 뒤섞인 사원에서 불교.. 2025.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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