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056 말만 많이 들은 그랜드 캐니언 Grand Canyon 콜로라도 강이 감돌아 흐르는 미국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이라 한다. 그래 그랜드 캐니언이건 캐년이건, 하도 말은 많이 들었지만 내 눈으로 보질 못했으니 언제나 궁금하기는 하다. 언제 마주할 날 있을 지 모르겠고, 그런 날이 오면 저 풍경이 포토샵 거친 그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날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한다. 인생은 유한이라, 그 유한에서 무한을 향해 아둥바둥 달려갈 뿐이다. 2024. 9. 3. 이집트에선 사관은 가부좌? 이것 말고도 이런 자세를 한 고대 이집트 서기관, 곧 사관史官이 꽤 알려져 있는데 형식화했는지 꼭 이런 가부좌한 모습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저긴 겨울도 없는지 맨날맨날 저리 벌개 벗은 상태다. 부처님도 아니고. 저 가부좌한 자세로 글을 적어내려간 것인지 모르겠다. 저 분은 저 서기관 중에서도 유명세가 가장 높다. 앉은 자세라 해서 Seated Scribe 또는 Squatting Scribe이라 부른다. 우리네 명명법으로 치면 서기관 좌상 정도가 될 터이다. 앉아 일하는 서기관 모습을 형상화했다 한다. 1850년 사카라의 세라피움 Serapeum of Saqqara으로 이어지는 스핑크스들의 골목 alley of sphinxes 북쪽 사카라Saqqara에서 발견됐다. 시기는 제5왕조 기원전 2450~2325.. 2024. 9. 3. 또 하나의 문화재 국가폭력, 지방은 짜가로 만족해라! 앞서 1995년 갈항사지 석탑 반환 운동이 실패했으며, 그에 대한 국가(중앙정부), 더 구체로는 국립중앙박물관애 내세운 어처구니 없는 반대 논리를 보았다. 한데 김천 지역에서의 저 석탑 반환 운동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다. 2003년에도 이 지역 사회단체들이 연대 서명해서 국가에 대해 같은 요구를 하고 나섰다. 물론 이번에도 역시 국가는 반대했다. 그렇다면 이때는 국가, 곧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떤 논리를 내세웠을까? 첫째 국가소유자산이기 때문에 반환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주인이 우리인데 감히 주인도 아닌 너희가? 이런 반대 논리였다. 둘째, 대신 그 대안으로 복제품을 제작해 원 소재지에다가 전시하는 방안이 있을 수가 있다. 꼭 이에 기반한 것은 아니지만, 근자 개관한 김천시립박물관에는 저 갈.. 2024. 9. 3. 국가를 빛내기 위해 갈항사 석탑 반환을 거부한 국가! 국가가 무단 점탈한 갈항사 석탑을 돌려달라는 요구는 현재 주어진 문서로 보건대 1995년에 이미 있었다.다만 당시는 여러 여건상 이 운동이 제대로 활기를 띠지 못하고 무엇보다 국가가 반대하자 이내 무산하고 말았다.그렇다면 국가는 왜 이런 반환요구를 묵살했는가?그 이유를 보면 기가 찬 대목이 발견된다.당시 김천지역 갈항사 석탑 반환 요구에 대한 1995년 12월 1일자 반환불가 공식 답변이다.불가 사유는 이렇다.1) 석탑 보존상태가 위험하여 점검 및 관리를 위해 보존과학실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관리하는 것이 최상책이다.2) 국보급 국가유산을 아무런 감시인이 없는 갈항사 폐사지에 이전하여 놓을 경우 전문절도단의 절취의 대상이 된다.3)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함으로써 국내외 관람객이 보다 쉽게 한국 .. 2024. 9. 3. 마침내 서광을 비추는 갈항사지 석탑 반환운동 오늘, 그러니깐 2024년 9월 3일 화요일 오전 10시 김천시립박물관 강당에서는 국보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김천 이전 추진위원회 발족식이 있었다. 이는 글자 그대로 김천 오봉리 금오산 기슭 제자리를 떠난 지난 백년간 타향을 떠도는 갈항사지 쌍탑을 제자리에 옮겨 놓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자리다. 김천시가 주도하는 모양새지만 그 발단은 이 지역 출신 송언석 국회의원이 방아쇠를 당겼고 민관 협의체라는 성격을 띤다. 이는 저 쌍탑을 강탈 점유 중인 국가, 더 구체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기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촉발됐다. 갈항사지는 현장은 금오산 기슭에, 탑은 서울 용산에, 그 복장 유물은 대구박물관이 보관하는 세 갈래 이산 생활을 하는 기이한 유산이다. 앞으로 저 석탑은 물론이고.. 2024. 9. 3. 산나물을 어떻게 볼것인가 산나물, 산채는 한국에서 현재 유독 많이 발달하고 남아 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20세기 이전에도 지금처럼 산채가 건강식이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 산채는 부족한 경작채소의 양을 보완하는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채소 경작. 조선시대까지도 경작 면적 그다지 넓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지금도 배추농사 생산 과잉이면 갈아 엎는데 썩기 쉬운 채소를 엄청나게 많이 지었다가 그걸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채소농사를 대규모로 짓는 곳은 서울 주변 등 대도시 일각이고 대부분의 시골 농촌에선 텃밭 수준이었을 것이라 본다. 따라서, 심는 채소의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도 모자라면 산채로 보충했을 것이라 본다. 왜 한국에는 산나물이 이렇게 발달했을까? 사찰음식의 유습인가? 필자가 보기엔 그것이 아니고.. 2024. 9. 3. 이전 1 ··· 547 548 549 550 551 552 553 ··· 334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