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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 매금寐錦 탐구] (1) 말뚝왕 414년, 고구려 장수왕 즉위 초반에 고구려가 작성한 이른바 광개토왕릉 비문에는 신라 왕을 일컬어 '신라매금新羅寐錦'이라 하며, 비슷한 시기 역시 고구려가 작성했다는 이른바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신라매금新羅寐錦'과 더불어 신라 왕을 일컬어 이칭으로써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5세기 무렵 고구려가 신라 왕을 지칭해 '매금'이라 일컬었다 보는 견해가 자리를 잡은 형편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닌 신라인 스스로도 그 무렵 자신들의 왕을 일컬어 매금이라 했음은 524년 신라 법흥왕 시절에 작성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당시 법흥왕을 일컬어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 했으니 이는 신라인 스스로의 신라 왕에 대한 호칭이 매금이었음을 본다. 아울러 시대가 훨씬 떨어져 신라 말 최치원이 작성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2024. 9. 25.
상아 자루에 한껏 멋을 부린 이집트 선사시대 돌칼 Material; Elephant ivory, flint Size; 25.5 centimetres (10.0 in) Created; Naqada II d from c. 3450 BC Discovered; Bought by Georges Aaron Bénédite in Cairo from antique dealer M. Nahman, February 1914 Present location; Musée du Louvre, Sully wing, room 633 Identification; E 11517 이집트는 대략 기원전 3150년 무렵에 청동기시대로 들어갔다고 본다. 이 시대 돌입과 더불어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왕조 국가로 돌입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저 상아 칼은 청동기시대 들어가기 대략 300년 전,.. 2024. 9. 24.
100년 전 풍납토성 재림 팡파르를 울린 을축년 대홍수 누누이 강조하지만, 풍납토성을 이 땅에 출현케 한 이는 물난리였다. 1925년, 을축년 7월 한반도를 강타한 네 차례 대홍수는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그 쑥대밭에서 화려한 부활을 알린 이가 바로 풍납토성이다. 당시엔 광주 풍납리토성이라 일컬었으니, 이 허허벌판 강변 황무지가 한강물에 잠기고, 토사가 쌓이기도 했지만, 토사를 밀어내기도 했으니 그 물난리가 지난 자리에 청동초두 2점이 화려한 팡파르를 울리면서 천오백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무슨 사연인지 모르나 큰 항아리 안에 보관되어 땅 속에 묻혔다가 이때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으니 깨진 그 항아리 사이로 문제의 청동초두가 화려한 부활을 알린 것이다. 2025년은 풍납리토성이 이 땅에 재림한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상류 지점 암사동 선사유.. 2024. 9. 24.
천년 왕국을 피운 꽃무릇 경주박물관 야외 유물 전시장 사이사이 꽃무릇이 곱게 피었다. 가을은 꽃무릇 타고 핀다. 2024. 9. 24.
퀀quern은 갈돌에 갈아야 제맛 뭐 볼짝없다. 갈판에다 갈돌로 곡물을 갈고 있는 장면이다. 브리티시뮤지엄 소장품 중 하나라, 이 석회암 조각상을 보면 하인이 퀀quern으로 보이는 곳에 곡물을 갈아주는 모습을 묘사하거니와 저 퀀이라는 것이 갈판이다. 저런 조각은 이미 고대 이집트 제1왕조(기원전 3100~2890년) 시기에 무덤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하니, 죽어서도 잘먹고 잘살라는 뜻으로 넣어주었을 것이다. 한 번 노예는 계속 노예, 한 번 주인은 죽어서도 계속 주인이니 있는 놈은 참 편안안 세상되겠다. 하인들은 대체로 베이커리, 양조장, 도살과 같은 일상에 종사했으니 저런 조각이 무덤마다 1~100개씩 다양하게 안치된다. 저 유물은 제6왕조, 기원전 2345~2181년에 속한다. 2024. 9. 24.
공산성의 꼽사리들 2014년 9월 23일 공주 공산성 목곽고 발굴 현장이다. 습지에서 백제시대 목곽고 흔적이 나오고 그에서 진흙 잔뜩 머금은 칠갑옷 비늘이 잔뜩 쏟아졌다. 그 칠갑편들에서는 해서체로 아주 잘 쓴 글씨가 또 잔뜩 나왔는데 당 태종 이세민이 사용한 정관貞觀(627~649)이라는 연호가 나왔다. 그 칠갑옷을 백제산으로 볼 것이냐 중국산으로 볼 것이냐 논란이 벌어졌거니와 암튼 저때 발굴단은 공주대박물관, 발굴단장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남석 선생이었다. 그 현장 공개라 해서 당연히 관심이 많을 때 그날 어이한 셈인지 김충배가 찡가들었다. 저때는 LH에 근무할 때인데 무슨 핑계 대로 왔을 것이다. 그 춘배가 가운데 꼽사리로 끼어들어 기념 촬영을 했다. 당시 공주대에 재직 중이었나? 자신이 없는 이훈 선생이 함께 했으.. 2024.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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