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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곡농경(x) 서곡농경(o) 우리는 도작이 아니면 몽땅 잡곡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용어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도작 이전의 잡곡은 엄밀히 이야기 하면 잡곡 농경이 아니라 millet를 주축으로 한 서곡(黍穀)농경이다. 서곡 농경이라하면 영어로는 millet farming이 되며 여기에는 콩 등 작물도 함께 재배하기는 했지만 주력 작물은 millet인 조, 기장, 수수가 된다. 잡곡농경이라는 용어가 과연 적당한 용어인가 한 번 논의의 필요가 있다. 2024. 6. 8.
잡곡 농경의 기원지로 주목받는 요하 유역 최근 중국쪽에서 나오는 논문에 표시된 잡곡농경 (millet farming)의 기원지 후보지역. 빨간색 폐곡선으로 표시된 지역으로, 황하유역에 몇개 그려져 있고, 공간을 건너뛰어 요하유역, 정확히는 흥륭와 문화 언저리에 잡곡농경의 기원지 중 하나가 설정되어 있다. 한반도의 잡곡농경은 이 지역의 영향을 직접 받았을 것이며, 도작이 건너오기 전에 이 문화가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의 주류였을 것이다. 위 논문 서지는 다음과 같다. He, K., Lu, H., Zhang, J., Wang, C., & Huan, X. (2017). Prehistoric evolution of the dualistic structure mixed rice and millet farming in China. The Holocene, .. 2024. 6. 8.
Millet과 쌀 농경의 역사 중국 초기 농경사에서 쌀 농사와 잡곡 농경 (millet)의 분포도. 쌀 농경의 북쪽 경계가 산동반도와 요동까지 뻗어 있다. 바로 이 루트를 통해서 한반도로 쌀 농사가 넘어 들어왔을 것이다. 발해만의 북쪽에서는 쌀농사가 확인된 바 없다. 따라서 요서지역에서 남만주로 확산한 비파형동검문화는 본질적으로 잡곡농경이다. 요동반도로 건너온 쌀농사는 남하하여 평양인근에서 기존의 잡곡농경과 결합한 후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남하했을 것이라 본다. 2024. 6. 8.
Millet의 영양가 : 잡곡 농경의 경쟁력 잡곡농경 주축이 되는 millet는 사실 쌀과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다. 100그램당 칼로리는 쌀 130, millet 119 탄수화물은 쌀 28.7, millet는 23.7이다. 칼슘 등은 millet가 오히려 더 높다.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쌀의 밀식 생산이 되기 전이라면, 쌀과 millet의 인구 부양력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millet는 가뭄 등 농사에 불리한 자연환경에서 빠르게 잘 자라기 때문에 벼농사가 혁신을 계속하여 좁은 토지에서 밀식생산하며, 온대지역에서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해지는 시기까지는 millet가 훨씬 유리한 작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잡곡농경지대인 황하유역에서 안정된 농업생산이 먼저 이루어지며, 장강유역은 오래전 쌀 농사가 시작되었음에도 .. 2024. 6. 8.
돼지 사육은 왜 잡곡농경지대에서 더 우세했나 중국의 경우, 잡곡농경지대인 황하유역과 도작 지대인 양자강 유역을 비교하면 전자가 후자보다 돼지 사육이 훨씬 전문적이었다. 돼지우리를 설치하고 키우기 시작한 것도 황하유역이며, 오래된 사육돼지의 흔적도 황하유역이 더 많다. 한반도는 어떨까? 한반도 남부지역은 사육돼지의 흔적이 뚜렷하지 않다. 돼지사육은 잡곡지대인 남만주 일대의 고구려-부여 문명에서 훨씬 흥했을 것이다. 왜 도작지역보다 잡곡지대에 돼지 사육이 더 많았을까? 사람이 무엇을 먹고 그 부산물이 무엇이 나오는가 하는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잡곡을 재배할 경우, 돼지를 사육하는 데 쓰이는 사료감이 훨씬 많이 나왔으리라 보는 것이다. 쌀 농사보다 잡곡 농사가 돼지키우기가 더 유리했을리라 보는 것이다. 돼지 사육은 고구려 부여가.. 2024. 6. 7.
투탄카멘 복원과 이집트의 자존심 아래 김단장께서 올린 투탄카멘의 복원과 관련하여 사실은 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투탄카멘 복원은 필자가 알기로 이집트 학자들이 아니라 이집트학자들과 협업한 유럽의 연구자들이 진행하였었는데 과학적인 연구 결과라 별 생각없이 발표하였겠지만 이 연구결과가 투탄카멘의 위신을 손상하고 이집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하여 난리가 났었던 것으로 안다. 지금 다시 뉴스를 찾아보니 예전에 필자가 알음알음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는 많이 보도되지 않은 것 같은데, 미라 연구는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King Tutankhamun was a warrior and NOT a sickly boy-king, experts sayLegend has it that Egypt's most famous king was f.. 202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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