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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상업전수학교의 동맹휴학 (1922) 1922년에는 목포에 있는 상업전수학교 (목포상고 전신)에서학생 동맹 스트라이크가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학생들을 꾸짖는 교사들이조선인을 반복적으로 모독한 것이 이유가 된 모양이다. 학생들이 준비물 지참을 잊었는데, 그냥 꾸짖으면 될 일을 "망국민은 할 수 없다""거짓말 하는 것은 조선인의 민족성이다""입학시험에는 되도록 조선인은 적게 뽑아야 한다"등등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더 있어 갈등하다가 아마 일이 터진 모양으로 이 시기 동맹휴학은 딱히 이데올로기나 독립운동의 측면보다도 이런 민족 감정을 건드리는 말 때문에 터져나온 것도 많았던 모양이다. 목포상업전수학교는 이 해에 발효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고등보통학교와 같은 수준의 5년제 목포공립상업학교가 되었다. 소학교 6년 .. 2025. 9. 11.
[연구소식] 청주박물관 도록에 짧은 기고문 하나 [필자 주] 이전에 한번 포스팅 했었는데 당시는 특별전이 개막되지 않아 세세한 내역은 쓰지 않았다. 이제 특별전이 개막했으므로 조금 더 보충해 글을 남겨 둔다. 9월에 국립박물관 중 한 곳에서 새로 열리는 특별전 "후지산에 오르다: 야마나시" 도록에짧은 컬럼 글을 하나 기고하였다. 일본 에도시대 콜레라에 대해서다. 필자의 연구 주제가 지금 크게 질병사에 대한 인문학적 검토로 방향을 돌린 바 최근의 작업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박물관 측에 감사드린다. 2025. 9. 11.
코딱지 만해서 놀라고, 흔해서 또 놀라는 후쿠사이 파도 후지산 꼴랑 2주간만 전시한다 해서 아쉽기는 하지만, 이거 가져 와서 꾸민다고 국립청주박물관이 고생한 모양이라우키요에 중에서는 우리한테 가장 널리 알려졌을 장면이라 저건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1760~1849)라는 작가 부악 36경富嶽三十六景 중 한 장면이라 가나가와오키나미우라神奈川沖浪裏라 후쿠사이 스스로 명명했거니와 포착한 시점이 바다 쪽에서 내륙을 바라본 것이니, 일렁이는 파도 사이로 왔다리갔다리 휘청휘청하는 배 세 척이 보이고그것을 뚫어 정면 정중앙 맨 뒤쪽에 눈에 절반쯤 덮인 후지산이 들어오거니와 물결을 눈발처럼 표현한 대목이 이채롭거니와 문제는 저것이 주는 착시다. 일렁이는 파도, 그리고 저 장대한 스케일에 지레짐작하고선 저 그림이 매우 장대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코딱지 만해서 25.7 cm ×.. 2025. 9. 11.
1922년: 조선교육령 가결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육제도는 1922년에 2차 교육령으로 정립되었다. 이때 만든 시스템이 1930년대 후반(1938년)까지 가며, 대략 16년 간의 긴 기간을 이 교육제도 하에서 보내게 되었다. 요약하면, 조선의 교육제도를 소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으로 만든 것인데, 이 제도는 일본의 교육제도와 달라 고등보통학교 5년을 마쳐도 일본의 제도와는 차이가 있어 바로 상급학교 진학이 힘들었다. 특히 한국에는 대학이 경성제대 딱 하나라 1930년대부터는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이들이 상급학교를 찾아 일본유학의 붐이 일게 되었다. 이때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이들은 바로 대학예과 진학이 되지 않아 모자란 교육제도를 보충하기 위한 과정을 일본에서 밟아야 했다. 이 2차 조선교육령이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있어 가장 중.. 2025. 9. 11.
독립운동의 가장 전형적 시대: 1920년대 우리가 독립운동 하면 생각하는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국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스트라이크, 해외의 많은 독립운동지사,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 일제강점기를 보면1920년대에 가장 가깝다. 1930년대가 되면 상황이 많이 바뀌어 우리가 아는 것과는 좀 달라지게 된다. 1920년대 사회면은 독립운동 기사의 연속이다. 2025. 9. 11.
금강산 옥류동 계곡을 아로새인 이름 최송설당 김천고 선배 김창겸 형이 올린 사진이라, 식민지시대 금강산 옥류동 계곡 한 장면이어니와오벨리스크 닮은 저 바위를 따라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거니와 형이 굳이 저 사진을 착목하는 까닭 중 하나가 저 송설당 할매가 다름 아닌 김천중고교 설립자인 까닭이다.영친왕 보모 출신으로 억척 같이 재산을 불렸으니 그렇게 모은 전 재산을 희사해 자기 호를 딴 송설학원을 설립하고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했으니 이것이 현재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 직접 모태가 된다. 역적의 후손인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생평 싱글로 지냈으며 슬하 자식을 두지 않는 대신 무수한 자식을 두었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송설학원을 통해 송설당 아들이 양산하는 중이어니와 창겸 형도, 나도 할매 자식이다. 각종 증폭 기술 사.. 202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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