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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설당, 몰적 89년만에 집안을 복권한 철의 여인 2004. 06.17 07:06:09(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그때 나는 바람 타고 씨가 날아와 생겨난 소나무였다. 그때 나는 암벽에 뿌리박은 소나무였다. 혼자 떠돌아다니며 한양에 살 때는 겨울철 고개 위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소나무였다. 시원스레 선조님들 한을 풀고 따뜻한 봄날을 되찾으니, 그때 나는 임금님 은혜를 입은 늙은 소나무였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그의 일생을 눈(雪)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말년에 전재산을 쾌척해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교)를 설립하게 되는 이 여인은 58세 때인 1912년 8월 경성 무교동(현재의 코오롱빌딩 자리)에 저택을 설립하고는 당호(堂號)를 송설당(松雪堂)이라 했다. 1855년(철종 6년) 금산군(金山郡.경북 김천)에서 홍경래의 난에 멸.. 2020. 3. 10.
변기 턱 걸친 불알 같은 거돈사지 느티나무 녹초되어 오줌싸다 변기 턱에 걸친 불알처럼 천년 담장에 걸친 거돈사지 느티나무가 무굽다. 잊힐까 두려웠던 그때가 오늘이 되어 문득 보니 잊혀져서 두려운 날이었다. 매장하고 나는야 간다. 놋5 폰 카메라에 겨울을 담아 보낸다. (2016.3.10) 2020. 3. 10.
처절한 고달사지에서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워 마냥 하늘 향해 부르짖고픈 고달사지에서..2016.3.10 2020. 3. 10.
박물관을 빛내기 위해 현장이 희생할 수는 없다 지광국사 현묘탑 원래 자리이면서 지금 경복궁에 있는 그 탑이 가야 할 자리가 어딘지 아는가? 저 거북 대가리 바로 전면, 바닥에 돌댕이 몇개 보이는 그곳이다. 저 돌덩이가 현묘탑 기단 다짐이다. 왜 돌아가야는지 이 하나로 대낮 같이 환하지 아니한가? 서울의 국립박물관을 빛내기 위해 현장이 희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16. 3. 10) *** 이 글을 쓴 지 4년이 지난 지금, 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은 결국 현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저 절규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광국사 현묘탑이야 100년 만에 제자리를 찾게 되었지만, 제자리를 떠나 유리걸식하는 유산은 지천이다. 그 대부분이 국립박물관으로 가 있다.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이 모조리 본래 집을 찾아 그것이 텅텅 비는 날이 문화재 민주.. 2020. 3. 10.
남의 비문에다 자기 울분을 토로한 최치원 "을사년(신라 헌강왕 11, 885)에 이르러, 나라 백성 중에 유도儒道를 중매쟁이로 삼아 황제 나라로 시집가 이름을 계륜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주하사柱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이름을 최치원崔致遠이라 하니, 唐 황제(희종·僖宗-인용자)의 조서詔書를 두 손에 받들었는가 하면, 회왕淮王(고변·高騈-인용자)이 준 의단衣段을 함께 가져 오니, 비록 이 영광 봉황이 날아다닌 일엔 부끄러우나, 학이 돌아온 일엔 자못 비길 만 하리라." 최치원은 지금의 경북 문경 봉암사에 남은 대당 신라 고 봉암산사교휘 지증대사 적조지탑 비명 병서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敎諡智證大幷序 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마디로 나는 당나라 대국에서 가서 출세했다 이거다. 이런 그의 신라 귀환을 그 자신은 금의환향으로 보았다. 비록 그의 귀국.. 2020. 3. 10.
바이킹의 후예 Max von Sydow 타계 '엑소시스트' 출연 명배우 막스 폰 시도우 별세송고시간 2020-03-09 22:45박대한 기자 이 배우 이름은 몰랐다. 하지만 아주 익숙한 얼굴이다. 런던 특파 부고를 통해 마주하는 그의 이름은 막스 폰 시도우라는데,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보면 Max von Sydow, 막스 폰 쉬도브 인 듯한데, 보니 이 할배 북유럽 스웨덴 출신이라, 어째 키도 열라 크다 했더니, 프로필을 보니 193센티미터라 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바이킹 후예는 물론이고, 네덜란드 사람들을 보면 특징이 영어를 열라 잘 하고, 덩치가 떡대라는 점인데, 이 친구들 성인 평균 남자 키가 180센티가 넘는다고 알 거니와, 암튼 이런저런 영화에서 존재감 강렬히 각인한 이 할배, 아바 선배다. 내가 기억할 만한 근래의 주요 ..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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