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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최송설당, 몰적 89년만에 집안을 복권한 철의 여인

by taeshik.kim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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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06.17 07:06:09

<조선조 마지막 궁중여류시인 최송설당>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그때 나는 바람 타고 씨가 날아와 생겨난 소나무였다. 그때 나는 암벽에 뿌리박은 소나무였다. 혼자 떠돌아다니며 한양에 살 때는 겨울철 고개 위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소나무였다. 시원스레 선조님들 한을 풀고 따뜻한 봄날을 되찾으니, 그때 나는 임금님 은혜를 입은 늙은 소나무였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그의 일생을 눈(雪)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말년에 전재산을 쾌척해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교)를 설립하게 되는 이 여인은 58세 때인 1912년 8월 경성 무교동(현재의 코오롱빌딩 자리)에 저택을 설립하고는 당호(堂號)를 송설당(松雪堂)이라 했다. 


1855년(철종 6년) 금산군(金山郡.경북 김천)에서 홍경래의 난에 멸문이 되다시피 몰락한 화순 최씨 사대부 집안에서 아들없이 세 딸 중 장녀로 태어난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은 집안을 일으키고, 억울하게 죽은 조상의 원한을 풀고자 절치부심했다.


그가 1912년 8월에 쓴 '송설당서'(松雪堂序)에 의하면 이때문에 결혼까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 나이 28세가 가까워지자 (집안에서) 바야흐로 혼인을 시키자는 의논을 할 때 내가 맹세하며 말하기를 '한번 남에게 내 몸을 맡긴다면 친정 일을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이니 결코 내 뜻을 따라 시집가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에 "악착스런 비둘기처럼 재산을 모으고 모으기"를 수십 년 동안 해서 마침내 "광무 5년(1901) 신축년 겨울에 하늘에 태양이 두루 비춰주심을 받고는 옛날의 원통함을 시원하게 씻음으로써 따뜻한 봄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1894년 고향 김천에서 상경한 최송설당은 고종의 계비(繼妃)인 엄비(嚴妃)와 가까워지고, 때마침 1897년 그가 황태자 이은(李垠.영친왕)을 낳자 입궐해 그의 보모가 되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마침내 몰적(沒籍) 89년만에 집안을 복권시켰다.


68세 때인 1922년, 그때까지 쓴 한시 167제 285수와 국문가사 50편 및 제문 등을 묶어 '최송설당문집'을 간행한다. 이 문집은 관련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국문학계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후수.신경숙 두 한성대 교수와 같은 대학 김종순 강사가 최근 '송설당의 시와 가사'(어진소리刊)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은 '최송설당문집'을 완역한 것이다. '조선조의 마지막 궁중 여류시인'이란 부제가 이 문집과 그 작자 송설당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고 있다. 424쪽. 1만5천원.


한편 65주기를 즈음해 그를 조명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최송설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오는 24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다. <사진 있음>

taeshik@yna.co.kr 

(끝)


*** 


어제 얘기 연장이다. 16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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