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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거물(朴居勿) 신라 하대 문장가. 삼랑사비문을 썼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고,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高氏)라 했다.”고 한다. 2018. 3. 6.
설인선薛因宣 김유신비를 지은 신라 국자박사.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김유신이 죽은 직후 비문을 썼다면, 문무왕 때다. '薛'이 성이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했고,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高氏라 했다.”고 한다. 2018. 3. 6.
경(敬) ☞부여경(扶餘敬. 혹은 夫餘敬) 2018. 3. 6.
부여경(扶餘敬/夫餘敬) 의자왕 아들로 백제 멸망 이후 당이 백제왕으로 책봉한 부여륭의 아들로, 즉천무후에 의해 백제왕에 책봉되긴 했지만, 허울뿐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의봉(儀鳳) 연간에 (부여)륭을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므로 융은 감히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무후(武后)가 그의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ㆍ발해말갈(渤海靺鞨)에게 분할되어 나라의 계통이 드디어 끊기고 말았다. 2018. 3. 6.
지수신(遲受信)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한 백제인으로, 임존성을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용삭 2년(662) 7월에…왕인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도 모두 평정됐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3년(663)…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 2018. 3. 6.
사타상여(沙陁相如) 흑지상지(黑齒常之)가 이끄는 백제부흥운동군에서 별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나중에 당군에 항복했다. 사타(沙陁)는 복성(複姓)이며, 이름이 상여인데, 아마 고대 중국 저명한 정치가 인상여(藺相如)나 전한시대 저명한 문학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에서 따온 듯하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이보다 앞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흩어진 무리를 불러 모으니 10일 만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상지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陁相如)와 함께 험한 곳에 의지해 복신에게 호응하다가 이때가 되어 모두 항복했다. 인궤(仁軌)가 진심을 보이면서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나타내게 .. 2018.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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