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1677 대들다가 결국 사과한 공효진 공효진 "모든 작품 소중…모자란 연기 쑥스러웠을 뿐"송고시간 | 2020-01-23 18:23 공효진이 어떤 이미지로 각인했는지, 남들한테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딱부러지다? 뭐 이런 인상이 짙다. 말을 참 맞깔나게 한다는 그런 전반의 긍정으로 일관하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 그가 발끈하며 승질 부렸다가 결국 사과하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 어떤 사정인지 정확히 파악은 못했지만 아주 오래 전에 출연한 '상두야 학교가자'라는 드라마인지 영화가 있었던 모양이라, 그에 출연한 영상을 따다 올린 어떤 사람 계정까지 과감히 쳐들어가서 "옛날 드라마 그만 소환해주시면 안돼요"라고 댓글을 달았다가 좀 터진 모양이다. 나름 예의를 차린다고 이런 표현을 쓴 모양인데, 암튼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나올 수가 있느냐 뭐 이.. 2020. 1. 23. 가라타 에리카...불륜이 사과할 일인가? 가라타 에리카 측, 불륜설 인정 "뉘우치고 있다"송고시간 | 2020-01-23 10:51 나는 이 여식을 몰랐다. 그래서 한국에도 소속사가 따로 있는 줄도 몰랐다. 이 친구가 이 일이 터졌다 해서 논란 중이라는 소식은 접하기는 했는데, 우리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 소식이 일본에서 전해진 까닭이었다. 한데 느닷없이 우리 일이 되었으니, 다름 아닌 그 출처가 그의 국내 소속사인 까닭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얘가 한국에도 소속사가 따로 있냐"고 되묻기도 했더랬다. 우리 방송팀에서는 블라블라 하면서 어느 광고에서 유명해졌다 했다. 그 다음으로 나는 "불륜이 왜 사과할 일인가?"라는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불륜은 사랑 아냐? 그건 프라이버시 아냐? 불륜이 사과한다 해서 해결될 일.. 2020. 1. 23. 개발소발 무령왕릉 무덤길인 연도 폭이 1.04미터 무덤방인 현실 바닥 남북길이가 그 곱하기 4인 4.2미터 그 바닥 북쪽 사분지삼을 깐 관대 남북길이가 그 곱하기 3인 3미터 그 나머지 남은 맨바닥 남북길이가 연도폭이랑 같은 1.04미터 연도 높이가 1.45미터 연도 길이는 그 곱하기 2인 2.9미터 현실 높이도 같은 2.9미터. 뭔가 보이지 않음? 이 평범한 팩트조차 2001년까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누가 했는가? 어느 기뤠기였다. 2020. 1. 23. 하회마을 명문가 후손 류시원, 재혼으로 다시 등장 배우 류시원, 다음달 비연예인과 결혼송고시간 | 2020-01-22 23:12 한국사회 전반에 비추어 한국 대중문화계에서는 본관을 내세우지 않는 점에 나는 특징이 있다고 본다. 한데 그 점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가 이 친구다. 등장할 때는 곱상한 외모라 해서 나름 주목받은 이 친구, 나중에는 그 가문 불천위不遷位 서애 후손이라 해서 한때 각광받았고, 그 본향이 안동 하회마을이라 해서, 옛날에는 아들놈 며느리, 요새는 손주새끼로 골머리를 앓는 영국 할매대왕 엘리자베스 2세가 방한하고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적에, 이 할매를 수행했다고 기억한다. 풍산류씨....지금도 이 가문 기세 완강하다. 류성룡이 유명한 까닭이라기 보다는 나는 그의 《징비록懲毖錄》이 결정적 공을 세웠다고 본다.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언제.. 2020. 1. 23.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 종손의 힘은 제사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17 종宗은 ‘으뜸’이며 그 자체로도 ‘통솔한다’는 뜻을 지닌다. 종손의 권한은 통솔권이다. 따라서 한대 유가儒家는 “종은 우러르는 것[尊]이다. 선조의 으뜸이며 일족으로부터 존경받는 바다.” 또 종의 법도는 형이 동생을 다스리는 것으로 종의 법도는 형의 법도이기도 하다. 공자孔子는 집에 들어가서는 부형을 섬기라고 늘상 말했다. 주周나라 사람은 효와 제를 함께 논했다. 이것이 바로 종의 법도이다. 후세의 동생[弟]이란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종손의 권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권이다. 종법구조에서 모든 자손이 제사권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단지 종손만이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권한이 있다. 시.. 2020. 1. 23. 조선시대 공무원 봉급명세서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급한 이런 녹패祿牌를 가지고 광흥창廣興倉에 가서 녹봉을 수령했다. 장성 행주기씨 종가 소유로 현재는 공공기관에 이를 포함한 집안 고문서 일체가 기탁된 상태다. *** 이하 김태식 補 문서에 동치同治 6년이라 했으니 1867년에 작성된 것이다. 권지승문원부정자 기양연權知承文院副正字 奇陽衍 앞으로 발급한 것이다. 문서 네모칸마다 정묘丁卯 8월 이래 동년 12월까지 달마다 표시된 것으로 보아 이 문서는 월급 형식으로 녹봉을 수령한 것이 아닌가 하며, 한번만 써먹고 버린 증서가 아닌듯 하다. 상평통보 운운하고 조선후기 상업경제 운운하나 헛소리다. 19세기 중반이 되도록 현물로 월급 수령했다. 입금? 그런 게 있을 리 있겠는가? 은행도 없고 캐피탈금융도 없었다. 2020. 1. 23. 이전 1 ··· 2860 2861 2862 2863 2864 2865 2866 ··· 361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