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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육조 고도 남경南京에서 전국시대 이래 육조 무덤 쏟아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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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지점



유적은 남경南京 주성主城 서남쪽 약 25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니 강녕구江宁区 강녕가도江宁街道(이전 강녕진原江宁镇)에 속한다.

태강太康 원년(280), 서진西晋이 오吴를 멸하고서 말릉현秣陵县 서남쪽을 잘라서 임강현临江县을 설치하고 이듬해 개칭하여 강녕현江宁县이라 하니 이것이 “강녕江宁” 이라는 지명 비롯함이다.

《건강실록建康实录》《경정건강지景定建康志》《지정금릉신지至正金陵新志》와 같은 지리서 기록을 근거로 보면 육조시대 강녕은 위치가 강녕진江宁镇이며 강릉하江宁河 북쪽이고 강녕하江宁河를 둘러 강구江口로 들어가는 지점이라 도성都城인 건강建康(지금의 남경南京) 서남쪽 중요 요처이고 보호 방벽이다.


육조시대 강동江東이라는 지역 범위



거시 지리 관점으로 보면 육조 강녕현이 위치한 강녕진은 장강 동쪽 해안에 인접해 있으며 전국 진한시대 '강동지구' 북서쪽에 위치하며 남북을 연결하고 동서를 소통하며 장강 수로를 통제하고 강동 배후 지역으로 침투하는 핵심 지점이다.

강녕가도 신도시 건설 PPP 프로젝트 그룹은 강녕가도와 강녕하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면적은 약 15만평방미터이며 다수의 계획 부지를 포함한다.

이 지역에는 화서촌华西村과 같은 자연 마을 전통적인 지역이 있어 인구 밀집 지역이다.


발굴지점



신도시 프로젝트 건설 및 토지 이전 계획에 따라 2019년 6월부터 2023년 5월까지 국가문물국 승인 아래 남경고고학연구소는 이 지역에서 1천15개에 이르는 고대 무덤을 발견하고 정리했으니 출토 문물은 거의 6천 건(組)에 달하며 무덤은 명청 시대까지 계속 썼다.

 

무덤 분포 양상



전국시대·한·육조 무덤은 688기가 발견되고 그에서 5천700여 점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송~명나라 무덤과 시대 미상 빈 토갱묘土坑墓가 일부 발견됐다.



쏟아진 무덤
출토 유물




(1) 전국묘장战国墓葬
59좌座. 모두 수혈토갱묘竖穴土坑墓이며 묘도墓道 기준으로 보면 있는 게 있고 없는 것이 있으니 있는 것은 평면 凸자형이고 사파묘도斜坡墓道가 무덤 바닥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묘도가 없는 것들은 평면 장방형이다. 장구葬具는 모두 단곽单棺을 쓰고 대부분 1관1곽一棺一椁이며 일부는 단관무곽单棺无椁 혹은 단관单棺에다가 작은 변상边廂을 두었다. 

출토 기물器物은 니질泥质 도기陶器가 대종大宗이며 도질陶质은 모두 푸석푸석하고 연약해 습한 토양 환경에서는 보존이 매우 열악하여 대부분 복구 및 성형이 어렵다. 

 

M952全景
M840全景
战国墓出土器物举例



기종器型으로는 정鼎·두豆·합盒·호壶·방钫·배杯·비匕·작勺·관罐 등이 있다.

묘 형식은 기본이 전국만기战国晚期 초식묘楚式墓에 속하며 개중에는 일부 월식越式 기물이 있으며, 개중 일부는 전국 말기에서 서한시대 초기에 걸치는 것도 있다. 

 
(2) 서한묘장西汉墓葬
406座인데 개중 하나는 토동묘土洞墓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혈토갱묘竖穴土坑墓다.

토갱묘土坑墓는 墓道가 있고 없는 것으로 나뉜다. 개개 토갱묘에는 돌을 채워 만든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고 그 배수로는 또 “암구暗沟-명구明沟” 형태로 바깥쪽으로 확장된다. 

장구葬具는 1관1곽一棺一椁이 위주이며 기타 단관무곽单棺无椁·쌍관무곽双棺无椁과 쌍관1곽双棺一椁이 일부 있다.

 

M57全景
M655揭露后全景
M787全景
M880全景



절대 다수 토갱묘土坑墓는 바닥이 비교적 상태가 좋다. 출토 기물 역시 풍부한데 陶器가 위주이며 니질泥质 도陶와 고온녹도高温釉陶, 그리고 인문갱도印纹硬陶가 있으며 녹도기釉陶器가 수량이 가장 많다. 

도기 기종으로는 정鼎·합盒·호壶·瓿·관罐·쌍진관双唇罐·단坛 등이 있다.

기타 동경铜镜·동전铜钱·동철병기铜铁兵器 및 도명陶冥币 등이 있다.

중류 후난성과 감숙성[湘赣]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늬를 입힌 인문경도기印纹硬陶器도 가끔 보인다. 

 

M496出土中游特征的器物组合
M787出土新莽钱币拓片
西汉墓出土陶器举例
西汉墓出土陶冥币举例
西汉墓出土铜镜举例

 



무덤을 쓴 시대는 서한西汉 가장 이른 시기에서 왕망王莽 시대에 이르는데 개중 일부는 동한东汉 초기에 속할 수도 있다. 

기물이 비슷하고 방향도 서로 같은 서한 초기 두 무덤이 발견되기도 한다. 

서한 중·후기에는 여러 무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가까운 가족묘지로 추정된다. 

 

平面避让式关系



M524 앞쪽으로 뻗은 배수로는 앞쪽 무덤을 피하고자 일부러 구부러진 상태이며 드물게 '平面避让式”'의 선후 관계를 보여준다. 


(3) 东汉墓葬
 
112좌. 무덤 형식은 토갱묘土坑墓·전목혼합결구묘砖木混合结构墓·전실묘砖室墓가 있다.

토갱묘土坑墓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지만 전실묘는 대부분 도굴 피해가 심하다.

일부 전실묘는 벽면이 상당한 높이까지 남았지만 수직으로는 기권起券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목재로 지붕을 얹은 전곽묘砖椁墓로 추정된다.

 

东汉砖木混合结构墓(M430)
东汉土坑木椁墓(M640)



출토기물로는 도기陶器가 많고, 그 도기는 기종으로 보면 호壶·부식관瓿式罐·쌍이관双耳罐·쌍진관双唇罐·뢰罍·단坛 등이 있다.

기타 동경铜镜과 동전铜钱, 그리고 철병기铁兵器 등이 있다.

 

东汉墓出土陶器举例
东汉墓出土铜镜举例



장강 중류 지구 문화 특징이 강한 기물 수량이 증가한다. 

 

排列有序的东汉家族墓



이 시기 배열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는 가족취장家族聚葬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공동묘지와 가족묘지가 병행하는  공간배치를 보인다.


(4) 육조묘장六朝墓葬

111좌. 전실묘砖室墓 위주이며 기타 간이한 협장형토갱묘狭长形土坑墓가 있다.

전실묘는 단실单室·쌍실双室·다실多室 등으로 나뉘고 묘장시대는 손오孙吴 서진西晋시대에 집중한다.

 

六朝砖室墓举例



출토 기물로는 도자기가 많고 기타 동경铜镜과 동전铜钱이 보인다.

자기로는 청자青瓷가 있는데 이미 월요越窑 생산품이 있고 기타 장강长江 중류지역 요구窑口 기물이 많다. 

도기 중 장유홍도酱釉红陶는 비교적 특수하다.

 

六朝墓出土纪年砖举例
M334出土器物
M508出土陶瓷器



전실묘砖室墓 일부에선 명문전铭文砖이 출토해 묘장시대와 묘주 신분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가치

남경南京 강녕江宁 화서촌华西村 전국 이래 육조시대 묘지[战国至六朝墓地]는 무덤 숫자가 많고 유형이 다양하며 기물이 풍부하고 시대가 연접하니 수백년에 이르는 문화 변화를 체현하니 남경南京 혹은 강동지구江东地区 전국한육조시대 역사 발전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一) 남경지구 전국시대 양항两汉 묘장墓葬 자료 빈공백을 메우다

남경은 육조 고도古都라, 육조가 남긴 유산은 풍부하지만 전국 양한시대 유산은 드물다. 이번에 발굴한 수백 기에 이르는 이 시대 묘장은 남경지구 전국 양한 시대 그 부족한 자료 공백을 메우고 남경에 손오孙吴가 건도建都하기 이전 인류 활동과 그 물질문화 양상을 보여준다. 

(二) 강동지역 초楚 문화 변천 양상을 보여준다

전국 중기 및 후기에 초 문화는 초나라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확장한다. 고고학 자료 한계로 이전 연구는 주로 강회江淮 지역에 초점을 맞추었고 강동 지역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남경 화서촌에서는 전국 말기 초식 무덤이 많이 발견되어 초 문화 분포 변화와 초나라가 강동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三) 문화 교류와 통일 국가 형성의 견고한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화서촌 묘지는 전국시대부터 육조시대까지 강동지역 문화가 만나 융합되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전국战国 진한秦汉 무렵에는 묘지가 월越·초楚·진秦·한汉 등 다종 문화요사가 교착交错한다. 

서한 중기 이후로 점차 한汉 문화가 핵심을 이루고 더욱 선명한 강동지역 특색을 띠는 한편 대량으로 장강 중류 지역 요소를 가미한 복잡한 문화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강동 지역이 통일 국가에 통합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문화 교류와 상호 작용을 보여주어 중국 문명의 다원적 특성에 대한 강력한 실증을 제공한다. 

 

***

이를 보면 중국에서 마을 공동체 묘지가 가족공동묘지로 변해가는 시점이 명확히 동한시대임을 보여준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한국문화사는 이 논점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고 있는가?

공주 송산리고분군을 보면 명확히 왕가 부여씨 가족공동묘지다. 

신라 또한 이 현상이 뚜렷한데, 서악고분군이 그 표식이다. 

이런 점들을 해명해야지 무슨 씰데없는 양식 타령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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