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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엎어치는 삼근왕] (2) 신라의 부용국 백제, 그 탄생 이야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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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사에서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고, 직후 3년은 미국의 식민지 내지는 부용국이었으며, 그 이후 한동안도 미국의 부용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냉혹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근자에는 이조차 부정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감지되거니와, 반제 반봉건을 앞세운 민족자결운동이 그것이라,

이걸로 피식민의 역사, 부용의 역사를 지우려 하지만 그렇다고 걸레 빨아 행주로 쓸 수는 없다. 

식민지는 식민지, 부용국은 부용국일 따름이다. 

더 간단히 말해 역사는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그 자존심 다 좋은데, 그 알량한 자존심 내세워 역사까지 호도할 수는 없다. 

한국고대사에서 대표적으로 역사가 호도되고 있는 시기가 백제사 기준 웅진 도읍기라,

특히 그 초중반이 그러해서 이 시기 신라 백제 관계를 간단히 정리하면 백제는 신라의 식민지였고 부용국이었다. 

이 너무나도 평범한 사실史實이 왜 그리 쉽사리 간과되는지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송산리 2호분 유리 박음 귀걸이. 이런 귀걸이 한성시대엔 없다!!!! 이 평범성을 곧잘 망각한다.



명명백백히 백제는 이 무렵 신라의 부용국이었다.

왕도 지들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신라가 점지해주는 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왜 이리 되고 말았는가?

475년 고구려-백제 전쟁이 빚은 파국이었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무참히 장수왕을 앞세운 고구려에 패배했다.

어느 정도로? 나라가 거덜났다.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으며, 그 와중에 개로왕은 사로잡혀서 아차산 아래서 참수당했는가 하면 왕도 한성이 함락되면서 8천 명이나 포로로 끌려갔다. 

군사는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 전쟁에 고구려가 동원한 병력이 3만이라는데, 그에 맞선 백제가 어느 정도 군사를 징발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궤멸을 거듭하다가 마지막 한성에서 다 죽었다.

다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로서 포로로 끌려간 규모가 물경 8천 명이었다. 

물론 그 8천 명이 꼭 한성 주민들이었겠는가?

지방에서 동원되어 올라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훗날 고구려에 해가 될 만한 젊은 남자들은 죄다 죽였을 테고,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은 거지로 방치했을 것이며,

노비로 쓸 만한 인력들만 대거 뽑아갔다.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그네는 논공행상용으로 내렸을 것이며, 기타 중년 부인이나 남성들은 노비로 삼을 요량으로 살려서 데려갔다. 

다 죽었다.

한성은 모조리 잿더미로 변했다. 

이런 백제를 살린 것이 바로 신라였다.

고구려가 침공하자 개로왕 특사로 문주는 신라로 급파된다.

자비왕한테 읍소한 전략이 성공해 신라가 구원병을 1만 명이나 내어준다. 

군사 1만. 이 정도를 동원한 신라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고구려와 일전을 불사하기 위함이었다.

여차하면 한 판 붙어 끝장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때 신라군 파견 사령관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왜국이랑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덕지나 벌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라 구원병을 대동하고 들어선 문주를 반긴 건 텅비고 잿더미로 변한 왕도 한성이었다.

더구나 왕위도 비었다.

이 와중에 왜 문주가 왕이 되었는가?

첫째 할 사람이 없었고 둘째 있다한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니 너가 해라 해서 엉겁결에 옹립당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왕위는 문주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얻어걸린 것이다.

누가 옹립했는가?

신라였다.

광개토왕비문을 보면 백제왕이 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이 되겠노라 맹세했다는 개뻥이 보이는데

문주는 달랐다.

진짜로 신라의 노객이 되겠노라 맹세하고선 왕위에 얹혀진 것이다.

국익이고 뭐고 나발이고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이제 한성을 어찌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으니 재기불능이었다.

결국 옮기는 수밖에 없었으니 이 결정도 문주가 할 수는 없었다.

신라가 정했다.

문주가 무슨 발언권이 있었겠는가?

예서 새로운 도읍으로 웅진이 결정되었다.

신라는 왜 웅진을 골랐을까?

간단하다. 통제가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다.

한성보다 웅진은 신라로서는 여러 모로 이점이 있었다.

수족이 없는 빈껍데기 왕 문주가 믿을 것은 오직 신라만 있을 뿐이었다.

신라군 호위에 문주는 그나마 남은 가재도구 몇 가지 주섬주섬 챙겨서는 남쪽으로 향했다.

신라의 부용국 백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나아가 백제 문물 역시 이때를 고비로 신라 영향이 아주 짙은 색채를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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