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 & THESIS

[엎어치는 삼근왕] (4) 웅진을 휩쓴 신라발 문화 쓰나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6. 20.
반응형

몽땅 도굴된 송산리 2호분에 체로 쳐서 건진 유리들. 이런 부장품 종래 한성시대 백제 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다! 어디인가? 이 새로운 전통 유래가?


 
앞서 정리했듯이 백제 웅진시대는 패망 일보 직전 신라 도움으로 가까스로 생환한 까닭에,

더구나 그 새로운 왕도 선정과 무엇보다 새로운 왕위 확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책 결정이 신라에 의해 이뤄진 까닭에 백제의 신라화는 그야말로 쓰나미처럼 흘러갔으니 

이런 점들이 그 시절 백제 왕가 묘역인 송산리 고분군에서도 실로 적나라히 드러난다. 

이번 송산리 1~4호분 재발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듯이 이 시절 백제 지배층 문화를 논할 때 신라를 빼고서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 왕릉군에 왕비 무덤도 있다고 보는데, 그 왕비 중 일부는 아예 신라 공주라 본다.

왜? 당시 백제는 신라의 부용국 신라의 식민지라 그런 부용국 그런 피식민지에서는 왕비조차 간택권이 없어 종주국 의지대로 움직였으니 

이런 면모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기존 사서에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화랑세기를 필두로 하는 남당 박창화 관련 수집 관련 문건에는 명명백백히 드러난다.

이를 보면 신라에 얹혀 엉겁결에 왕이 된 문주도 신라가 주는 왕비를 받아들여야 했으니, 이 사이에서는 왕자까지 태어났다.

이 왕자가 훗날 파란을 부르는 듯하다. 

나아가 웅진 중기, 나아가 웅진시대 내내 웅진은 신라인들이 활보하는 시대라,

그 유명한 법흥왕, 곧 지증왕의 장자로서 신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이 위대한 왕은 젋은 왕자 시절, 아예 웅진에서 난봉 생활을 하기도 하는데,

확실한 차기 대권주자로서 양기까지 센 이 막강 신라의 권력자는 웅진 백제 왕가 여인들을 마음대로 농락했으니 

그래 화랑세기 믿지 못하겠다 운운한다면 더는 할 말도 없지만,

삼국사기랑 삼국유사에서는 탈락한 누구나 상상 가능한 그 생생한 장면, 곧, 신라가 복위한 웅진 시대 백제가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그 와중에 백제의 신라화가 얼마나 쓰나미였는지를 이보다 생생히 보여주는 장면 있던가?

그렇다면 이런 신라화 물결이 송산리 무덤에서는 어찌 드러나는가?

간단하다.

그 장법葬法 자체가 철저히 철두철미 신라적이다. 

장례를 흔히 박장薄葬과 후장厚葬으로 나눌 때 백제 장례 문화는 철두철미 철저히 박장 시스템이라 무덤에서 물건다운 물건을 묻은 적이 없다.

봤는가?

백제 무덤에서 뭐 볼 만한 게 있던가?

백제가 본래 먹을 것이 없어 이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백제는 철저히 박장 시스템이었다. 

그런 백제가 어느날 느닷없이 무덤에다 보물을 바리바리 쑤셔박는 후장으로 변했다.

그것이 언제인가?

놀랍게도 웅진시대 개막 직후다.

무령왕릉 봐라!

저런 무덤? 종래 한성시대에는 생각도 할 수 없다.

한성시대 대표적인 무덤들로 위선 석촌동 고분군은 그 시대 왕가 무덤임이 확실한데 그렇게 파제꼈는데 물건다운 물건 하나 없다!

아예 없다! 

하남 감일동 백제 석실분은 한성기 지배 계층 무덤들이어니와 그래 계수호라 해서 닭대가리 청자 하나 나왔다 해서 대서특필하지만 기타 없다!

그런 중국 수입산 청자 한두 점 말고는 볼 만한 유물이 없다! 

한성기 대표적인 다른 석실분 공주 수촌리 무덤 보자.

그래 금동관 나오고 금동신발 나오고 중국 청자 나왔다 해서 대서특필했지만, 이거 빼고 나면 볼 만한 유물이 없다! 

이것이 백제 장묘 시스템이다. 

한데 이런 백제가 어느날 느닷없이 바리바리 무덤으로 보물을 싸서 가는 시스템으로 변모한다. 

귀걸이도 종래 껍데기 흉내만 내던 백제가 완연한 신라식 귀걸이를 장착해 동시대 신라 왕가 무덤에 견주어서도 부끄럽지 않을 화려한 귀걸이 문화로 느닷없이 바꾸고,

기타 금관이며 허리띠며 신발이며 기타등등 아무튼 보물들을 쑤셔박는 시스템으로 변해간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볼것 없다.

신라의 영향이다.

신라가 백제의 근간을 바꿔버렸다. 

 
[엎어치는 삼근왕] (3) 웅진 초기에도 굳건히 백제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엎어치는 삼근왕] (3) 웅진 초기에도 굳건히 백제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웅진도읍기 백제 왕가 묘역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종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2023년 9월이래 조사한 중간 성과를 그제 발표했거니와개중에서도 1~4호분이라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