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휘가 도경이라. 그의 가문 내력에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 다만 장인이 저명한 목수 신영훈이며, 그의 부인 역시 아버지를 이어 한옥학교를 운영한다.
그는 한국 고건축학계의 신성이었다. 고려대 건축학과 주남철 교수 지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현장에서 실무를 아울러 익혔으니, 그야말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중견 중의 중견이었다.
공은 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의 속내가 어떠한지까지는 내가 파고 들지 못했으나, 언제나 그 미소는 상대를 편안케 했다. 퍼머를 한 여파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언제나 그의 머리카락은 곱슬에 장발에 가까웠다.
나랑 그리 가찹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았다. 술을 못 마시는 내가 술을 즐기는 듯한 그와 술로 고리를 엮을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일로, 우연히 만나는 일이 전부였으나, 그와 나를 이어준 고리는 첫째, 담배요 둘째, 같은 양띠라는 태생이었다.
언제인지 이제는 아득해졌지만, 내가 문화재 기자 초창기 혹은 그에서 그 중년으로 넘어가던 시절, 전국 주요 대학 그해 박사학위 취득 논문 현황을 조사타가 고려대 건축학과 박사학위 논문 목록에서 공의 이름을 발견했다. 학교에 물어 연락처를 확인하고는 그에게 연락하니 잉크 냄새가 여전한 제본 박사학위 논문을 붙여왔다. 물론 친필 사인을 잊지 아니했다.
단숨에 독파하고는, 아,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고건축학도가 나타났다고 무척이나 기뻐한 기억 또렷하기만 하다. 이후 그의 이름을 한동안 잊고 있다가 그의 이름이 단독 저자로 들어간 신간을 보고는 그래, 이 친구가 그 사람이었던가 하고는 빙그레 웃은 기억이 있다.
그 무렵 강원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는 풍문도 있었다. 조만간 주남철 교수가 정년퇴임으로 비운 모교 후임으로 옮겨가겠거니 했다. 그 빈자리를 채울 유일한 후보자가 내 보기엔 공이었다.
그러다 어찌하여 이런저런 인연으로 이런저런 자리에서 이런저런 일로 이러저러하게 마주치는 일이 더러 있었으니, 나랑 마찬가지로 애연가인 그는 언제나 학술대회 플로어보다는 흡연장을 좋아했다.
혜성처럼 등장해 폭풍처럼 새바람을 일으킨 그가 벼락처럼 갔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한창 일할 나이에 참말로 황망하게 가니 더더욱 어이가 없다.
혹여 내 탓이었을까 자문해 보거니와, 그래 그러고 보니 어느 기관 어느 단체, 어느 개인이건 좋은 고건축학도 소개해달라 할 때면 언제나 나는 공을 추천했으니, 요즈음 이리도 바쁜 공의 나날에 내가 깃털 하나 무게를 더하지 않았나 자책해 보기도 한다.
몇달 전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어느 학술대회였던가? 이날도 역시 발표자와 토론자, 혹은 종합토론 사회자와 토론자로 다시 만난 나는 그 예의 박물관 입구 구석데기 옹이 재털이 앞에서 연신 담배를 같이 빨며 이런저런 얘기 웃어가며 나누었으니, 그것이 이승에서의 인연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때 알았으되, 공은 학교 홍보실장이라는 중책을 수행 중이라 했으니, 그 말에 대뜸 내가 꺼낸 말이 "기자들 수발이랑 집어치시오. 그건 사람이 하는 일 아니오. 기자는 생명을 앗아가는 족속이오"였으니, 아, 그 말이 이리도 적중한 것이란 말이오?
그때 공은 언제나 그랬듯이 겉으로는 건강하게만 보였다오. 다만, 기자들 접대로 피곤타 하고, 나도 빨리 집어치고 공부를 하고 싶다 했으며, 술을 하도 마셔 술배만 나온다고 한 말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한창 물이 오른 때라 이런저런 자리에 너무 자주 불려가는 것이 아닌가 했으되, 그것이 이리도 결말할 줄 나는 미쳐 몰랐소. 괜실히 미안하외다. 언제인지 모르나 저승에서 만날 때면, 아마도 나 역시 이승에선 마시지도 못한 술을 말로 마실게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때 거나하게 한 잔 합시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괜실히 미안하오. (2016. 10. 12)
***
이 애도문은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직후 내 페이스북에 쓴 글인데, 블로그로 옮길까 말까 언제나 고민하다가 지금에서야 옮겨놓는다. 다시금 그의 극락왕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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