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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고통과 분노로 점철한 모교를 내 발로 찾아나서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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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설당 묘소



내 세대 모교, 개중에서도 고교는 냉혹히 따지자면 입시감옥이라 아침 일곱신지 여덟시까지 등교하고선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열한시까지 가둠 신세였으니

또 거기에 이른바 요새 하는 말로 학폭이니 하는 문제가 만연하고 걸핏하면 선생한테 밀대 자루로 빠따질 당하고 교련시간엔 개머리판으로 얻어터지고 어금니 깨물어햐는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얻어텨지고


송설당 묘소에서



그에다가 나는 찢어진 가난으로 걸핏하면 굶는 연탄보일러 자취생활을 했으니 그게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 시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군대를 다시 가고 말겠다.

그런 모교를 어찌 하여 느닷없이 찾고 싶어졌는지 모르나 이 학교 졸업한지 근 사십년만에 두 번째로 내 발로 찾게 되었으니

접때는 지인을 마침 모교 근처에서 만나기로 해서 일찍 도착한 김에 시간이 남아 교정 입구에서 아주 가까운 본관 근처까지 가서 교주 송설당 할매 사진만 두어장 박고 말았을 뿐이라


본관
송설당 묘소



하지만 오늘은 어이한 셈인지 괜히 찾아봤음 하는 바람이 불었는지 마침 김천에서 내가 사회하고 토론하게 된 수도암 학술대회가 있는지라 차를 몰고 비교적 일찍 남영동을 나서니 도착 예정시간과 학술대회 시작은 두 시간 정도 터울이 있어 내비에다 무심코 김천고등학교를 찍고 말았다.

결과로는 그리 되긴 했지마는 변수가 있어 생각보다 시간 여유가 많지는 아니해서 서둘러 대강만 둘러보고 말았다.

중간에 아점을 겸해 휴게소에 들르야한 데다 어제부터 계속 비가, 것도 겨울비답지 아니하는 폭우가 내내 몰아치니 아무래도 전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송설당



벌써 사십년이 흘렀으니 변하지 않은 데가 있겠는가? 건물도 곳곳에 들어서고 학교 또한 그냥 사립고에서 자사고인지토 변했으며

그땐 한 반 대략 60명 한 학년 10개반이 있었으니 재학생만 물경 천오백명을 넘었지만 지금은 재학생 다 합쳐봐야 몇 백명 되지도 않는다고 들은 듯하다.

그래도 옛날 풍모 유지한 건물들이 남아있으니 1931년 김천고보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역사를 웅변하는 본관은 당시엔 교무실로 썼는데 지금은 뭐로 쓰는지는 확인치는 못했지만 이후 그 전면 교주 최송설당 할매 동상과 더불어 나란히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송설당 신도비



그 인근엔 송설역사관이 들어서서 학교 역사를 정리한다.

그 뒤편 산 언덕 학교를 내려보는 데는 송설당 묘소가 있으니 개교기념일인가에는 단체로 성묘를 했더랬는데 비가 추적추적하는 그 언덕길을 올라 묘소를 참배했다.

그래 돌이켜보면 고통과 분노로 점철하는 학창시절이만, 또 그것이. 너무 깊이 각인하는 바람에 별로 좋은 회상은 아니나 그렇다고 이른바 낭만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또 돌이켜 보면 이 학교가 아니었던들 내가 이후 누린 혜택들이 가능키나 했겠는가?


송설역사관



어디 가서도 나는 김천고 출신임을 당당히 내세웠고 그것이 아주 자주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고맙기 짝이 없다.

역사관서 역대 교사들 사진을 보며 폭력으로 이름 높았던 선생님 얼굴을 대하며 이제는 파안대소하니 나도 늙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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