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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수릉壽陵, 자기가 만든 자기 무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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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경주 傳 황복사지 인근을 발굴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미완성 왕릉을 발굴했다면서, 그 성격을 가릉(假陵)이라 규정한 조사성과를 공개했다.

보통 제왕이 자기가 죽어 묻힐 곳으로 생전에 미리 만든 무덤을 수릉壽陵이라 하는데, 그런 용어가 싫다 해서 가릉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아마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는 가묘假墓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데, 그것이 왕릉에 대한 버전이 가릉일 것이므로, 그 명칭이 가릉이건 가묘건, 임시 무덤을 말한다는 점에서 저 용어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분명 조사단에서는 저 무덤이 만들다가 어찌된 이유로 중단하고 폐기한 왕릉이라 해서 저리 이름을 붙였지만, ‘미완성 왕릉’이라 하는 편이 훨씬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한다고 본다.

가릉이나 가묘는 temporary tomb라는 뜻이지, unfinished tomb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사단이 사용한 가릉은 맥락으로 보아, 후자다.
 

한국사회에서 무덤만큼 복잡한 문제 또 있을까?

 
그것이 설사 조사단 추정 혹은 주장처럼 미완성이라 해도, 그것 역시 수릉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생전에 자기 묻힐 곳으로 만든 무덤 일종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릉이란 대체 무엇일까? 
 
수릉은 우선 그 개념어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으니, 壽란 단순한 목숨이 아니요, 여기서는 longevity를 말한다. 역설을 빌려 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수릉은 연원이 아주 깊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내가 확실한 증거를 지금 이 단계에서는 포착하지 못하나, 진 시황제는 확실히 그 생전에 그 자신의 무덤을 대대적으로 만들었으니, 이후 역대 중국 제왕은 이 패턴을 공식화한다. 
 
한국사를 보면 내가 보고 들은 바가 짧은지 모르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확실히 자기 무덤을 자기가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와 계획은 달라, 이성계는 그가 잡은 곳이 나중에 문제가 있다 해서, 다른 곳에 묻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례로써 고려시대 역시 수릉이 일반 패턴이었음을 안다. 이성계는 내가 누차 지적했듯이 고려인이다. 
 
신라시대는 기록이 엉성해 알 수는 없으나, 장례 기간으로 보아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죽 수릉이었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월역일제以日易月制’라 해서, 거상 기간 27개월 혹은 25개월을 하루 한달을 치는 시스템이 보편화하기 때문이다. 
 
왕건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죽은 지 27일 만에 매장하고 상복을 벗었다. 이를 처음 도입하기는 내 기억에 한 경제景帝인가 文帝거니와, 27개월 거상기간이 지나치게 길어 생활에 여러 모로 불편하다는 반론은 이미 공자 시대에 있었다.

공자는 이 경우 무대포 원리주의에 가까워 3년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제왕이 3년 동안 상복 입고 있으면 생활 불편을 차치하고라도 권력누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심책으로 나온 것이 이일역월제다. 
 
문제는 이런 단축이 급속도로 능제陵制 시스템에서는 수릉의 가속화를 불러왔다는 점이다. 
 
25일, 혹은 27일 만에 매장까지 끝내려면 제왕릉은 규모가 크고 돈이 열나 들고 공역이 엄청나므로, 막상 죽음과 더불어 곧바로 시작한다고 해도 도저히 이 기간에 무덤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 
 
두 번째로 무덤 구조의 변화를 불러왔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수릉이 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일본의 전방후원분도 수릉이 될 수는 없다.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없거나 그렇기는 무척이나 힘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수는 있으나, 이 경우 저 거대한 봉분을 다시 파제끼고 묻어야 하기 때문에 수릉일 수가 없거나 곤란하다. 

신라 적석목곽분이나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그 계획에서 완공에 이르는 시간이 居喪기간이다. 

왜인가? 미리 만든 무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발굴결과를 봐도 이들 무덤이 미리 만들어 놓고 나중에 해당 피장자가 죽어서 그 시체를 묻기 위해 다시 봉토를 판 흔적이 없다. 따라서 결론은 하나다. 

적석목곽분은 사람이 죽어서 비로소 입지 선정을 비롯한 공사 계획에 착수했으며, 그가 묻힌 시점이 바로 묘지 조성이 끝나는 시점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상복을 벗는 시점이었다. 
 
신라의 경우 아마도 태종무열왕 무렵 이후 석실분으로 간 듯한데, 중국식 예제가 확실히 상장제에도 도입되었다는 증거다.

석실분이어야 생전에 미리 무덤을 맹글어 놓았다가 왕이 죽으면 간단히 대문을 열고 왕을 안치할 수 있게 된다. 
 
석실분 도입은 합장 시스템을 일반화했다. 대문만 따면 되므로, 이 석실분은 여러 모로 경제적 편익이 있었으니 봉분을 두 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덤이 열라 크다 해서 그것을 만든 사회 혹은 국가, 혹은 그를 대표하는 군주가 진정한 고대국가에 돌입했니 하는 말은 허무맹랑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고총高塚 고분의 등장을 권력자, 혹은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 state 의 등장 지표로 삼은 고고학도들 말은 경청할 필요가 전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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