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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pedia

공후(箜篌)

by taeshik.kim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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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侯”(공후) 또는 “坎侯”(감후)라고도 표기한다. 고대의 撥弦 악기 중 하나로 分臥式과 豎式 두 종류가 있다. 臥箜篌는 전하기를 漢 武帝 때 樂人인 侯調가 제작했다고 한다. 唐代 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漢武帝가 使 樂人侯調하여 所造케 하고는 以祀太一하게 했다. 或云하기를 侯暉가 所作한 것은 其聲이 坎坎 應節하여 謂之하기를 坎侯했다. 聲이 訛하여 爲 箜篌했다, 篌란 樂工人의 姓에서 말미암았을 뿐이다”고 했다. 나아가 《통전》은 “舊說一依琴制. 今按其形, 似瑟而小, 七弦, 用撥彈之如琵琶也”라고 했다.


豎箜篌는 豎琴의 前身으로서 後漢 時에 西域을 거쳐 中原에 들어왔다. 다시 《通典》에 근거할 때 “豎箜篌는 胡樂也라, 漢 靈帝가 好之하여, 體는 曲하지만 長하며, 二十二 弦이 있고, 懷中에서 豎抱하고는 用兩手하여 齊奏하니, 俗에서 謂之하기를 擘箜篌라 했다”고 했다.


이 외에 鳳首箜篌가 있으니 豎箜篌의 一種이다. 形制는 豎箜篌와 相同하나, 鳳首로 장식했다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唐代에 印度와 緬甸을 통해 傳入되었으며, 燕樂의 天竺樂에서 사용되었다. 箜篌는 漢唐時代에 매우 성행했으며 석굴 벽화라든가 浮雕 작품에서 자주 보이며, 文人 또한 詞中에서 항상 樂人이 箜篌를 연구하는 정경을 묘사하곤 했다. 宋代에 이르러 箜篌․小箜篌, 그리고 鳳首箜篌 등의 다종다양한 공후가 발생했다. 명대 이후에는 점차 사용이 줄어들어 마침내 失傳되었다.  


이 공후인에 얽힌 이야기로 우리에게는 고조선의 곽리자고 처가 전했다는 백수광부 일화, 즉 공무도하가가 있거니와 이는 최표의 고금주에 전한다 했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무수한 교과서적 해설이 있거니와 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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