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원주原州 흥법사지興法寺址 진공대사眞空大師사 충담(忠湛, 869~940)의 탑비塔碑 잔존물이다. 잔존물이란 온전치 못하다는 뜻이어니와, 이것이 왜 그런지는 잠시 뒤에 보강하기로 한다.
탑비塔碑란 주로 승려에 대해 쓰는 무덤 장식물로 우리한테 익숙한 조선시대 무덤으로 본다면 무덤 앞에 세운 승려의 신도비神道碑다. 신도비神道碑는 흔히 그에다가 묻힌 사람 생전 행적을 잔뜩 자랑하는 글을 써놓는 까닭에 흔히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 하듯이, 탑비塔碑 역시 그러해서 이것 역시 흔히 탑비명塔碑銘이라 부르기도 한다. 탑비는 비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데 견주어 탑비명은 그에 적힌 글 내용에 중점이 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불교승려는 이것도 그 도입 초창기인 신라시대에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서, 그 시대 일반 매장 패턴과 비스무리하게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묻은 듯한데, 이것이 통일신라시대가 개막하면서는 좀 변해서, 그 발상지 인도에서 보통 그랬듯이 화장하는 양식으로 변모한 게 아닌가 하는데
대체로 화장을 하고는 수습한 뼈 결정체를 사리舍利 혹은 奢利라 하거니와, 이런 사리를 안치하는 무덤을 만들거니와, 동시대 승려가 아닌 사람들과는 달리 불탑佛塔 모양으로 만드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런 탑모양 승려 무덤을 한국불교미술사에서는 부도浮屠 혹은 부도탑浮屠塔라 하는 일이 많지만, 이는 개소리라
부도란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 일반에 대한 명칭이지, 어찌하여 우리네 불교미술사학도들은 이를 부처님이 아닌 다른 승려 사리탑에 대해 이렇게 부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무식하면 용감해서 그런갑다 한다. 차라리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승탑僧塔이라 부르는 편이 외려 훨씬 오해를 줄인다고 나는 본다.
보통의 승려는 승탑만 만들어 그 안에다가 해당 승려 사리를 안치하고는 석조물을 세워서 그에다가 누구 무덤인지를 밝히는 글자를 간단히 새기고 말지만, 이른바 고승高僧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은 달라서 특별대접을 하게 되는데 신라말 고려시대 흐름을 보면 이른바 왕사王師 국사國師라 해서 넘버원 혹은 넘버투 자리를 차지한 역임한 승려들은 달라서
무덤인 사리탑은 물론이고, 그 생전 행장인 신도비를 열라 크고 화려하게 맹글어 그 인근에다가 세운다. 이 진공대사라는 분도 태조 왕건이 스승으로 섬겼다 해서 그가 입적하자 원주 땅 흥법사라는 데다가 열라 크게 무덤을 짓게 되는데, 그 흔적 중 꼴랑 저것만 남아 현장을 지킨다.
한데 현재의 양태를 보면 거북 모양 받침인 귀부龜趺에다가 용 대가리를 장식한 모자인 이수螭首(본래 발음은 리수) 부분을 임시 땜빵으로 얹어놓은 것이다. 원래 모습에서는 왕청나게 찌그러진 형태지만 이게 묘한 맛을 준다.
비석은 해당 인물 행적을 정리해 새기는 부분인 비신碑身이라는 몸돌이 주축이다. 이수와 귀부는 그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비석은 사람이랑 그 근본 그랜드디자인 grand design이랑 같아, 사람이 몸통 말고도 팔다리머리가 있듯이, 비석 역시 그러해서 온전하게 이런 부분들을 갖추게 된다.
이 진공대사 탑비 혹은 탑비명은 정작 몸통은 깨져나가고 흩어져 포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머리랑 발목만 딜링 남았다. 그 깨진 몸돌 일부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지금도 아마 1층 고려실인가 전시하는 걸로 안다.
한데 우리가 유의할 점은 탑비塔碑는 무덤 장식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덤에서 핵심 core 은 누가 뭐라 해도 그런 사람이 진짜로 묻힌 곳이다. 이를 한국고고학에선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라는 이상야시꾸리, 일본말 찌꺼기를 갖다가 쓰는데, 어차피 이놈들이야 간도 배알도 없는 놈들이라, 논외로 치고, 암튼 그런 매장주체부를 형성하는 봉쇄한 지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데, 당연히 없는 경우네는 땅을 편평하게 만들거니와, 별도 시설물은 그 재료에 따라 다양하게 장식하니, 지금의 우리한테 가장 익숙한 것은 엄마 찌찌 같은 봉긋한 흙더미라, 이를 흙더미를 일러 봉분封墳이라 한다. 애초 이 말은 封과 墳인데,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라, 그냥 封 혹은 墳이라 해도 되지만, 특히 한국어는 단음절 단어를 무쟈 증오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별게 없어 동음이의어가 너무 많은 까닭이다.
또 고고학 욕하다 보니 신나서 옆길로 샜는데, 암튼 열라 유명한 불교 승려는 언제나 해당 인물을 화장하고 그 사리를 수습하고는 그것을 봉안한 무덤인 탑과 함께 저런 신도비를 세워서 이 분이 열라! 열라! 열라! 유명하신 분이며 훌륭한 분이었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일삼게 되거니와
그렇다면 이 진공대사 무덤을 장식한 비석은 저렇게 편린이라도 남겼지만 정작 그 무덤인 탑은 오데로 갔을까? 어처구니 없게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일본놈들이 뽑아다 이리저리 돌리던 것을 지금은 서울 박물관 뜰에다가 가져다 놓고는 구경거리로 전시 중이어니와, 그런 양태가 현재에 이른다.
한데 이 진공대사 무덤은 특이하게도 그 앞쪽에 석관石棺이 따로 있어 세트를 이룬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안치한 부도가 그렇고, 여타 승탑도 대체로 탑 안에다가 사리공舍利孔이라는 구녕을 파서 거기다가 안치하게 되지만, 진공대사는 무슨 이유가 있었던지, 그걸 탑 안에다가 안치하지 못하고, 석관을 별도로 마련해 거기다가 묻었던 것이다. 나는 내심 그 사리탑이 너무 작아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데, 이 석관을 보면 고려시대에 성행하게 되는 그 석관과 매우 흡사해서, 나는 고려시대를 장악하는 석관이 혹 이런 불교문화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어쩌다가 이야기들이 이리도 옆길로만 했는지...뭐 스핀오프가 때론 재미있는 법이니깐, 특히 한국불교미술사와 한국고고학 욕퍼붓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암튼 본론으로 돌아가 작년 원주시가 흥법사지를 처음으로 발굴했다. 여러 포석이 있다. 앞으로 발굴을 통해 탑비와 부도의 원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저 부도와 석관은 당연히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언제까지나 국박을 채운다고 볼모 생활을 할 수는 없다.
지금은 현지 사정이 안되니 국박에 임시 보관했을 뿐이다. 언제까지 현지 사정 안된다고 잡아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화재 환수는 국경 너머의 일만이 아니다. 일본에 대고는 우리 약탈 문화재 돌려달라 삿대질하면서 정작 우리 안의 약탈문화재는 눈을 감는단 말인가? (이상은 2016. 3. 5 글에다가 살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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