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든 4인 가족의 동상을 받치고 있는 기단 전면에는 (상이군경 직업재활원을 포함한) 종합원호원의 신조가 새겨졌는데 그 문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길
자유와 평화와 민권을 위한
봉사와 희생은 근본신조다
새롭고 명랑하고 바르게 살아
이 긍지 이 전통 길이 빛내자
사랑과 협동으로 한데 뭉치어
조국에 감사하는 역군이 되자
깨끗이 부지런히 정성을 다해
성실한 생활 속에 보람을 찾자
농촌으로 직장으로 즐거히 나가
내 힘으로 내 갈 길 개척하리라"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조상기造像記가 써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장의
분부를 받들어 여기에 종합 원호원을
세워 민족정기의 상징을 삼는다
1962년 12월 15일
원호처장 육군소장 민병권"
61년 5.16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은 상이군경 처우 개선을 사회 안정을 위한 우선 과업으로 삼았다. 이 문제는 휴전 직후부터 사회문제로 떠올랐으나 적절한 지원 없이 방치되어 있었고 4.19 이후에도 정책 순위에서 밀린 탓에 상이군경들의 불만은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를 직시한 군사정권은 상이군경 처우 개선을 통해 불만을 잠재우고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민정 이양 전인 군정 시절에 서둘러 정책을 시행해 주무부처인 군사원호처가 탄생한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당시 모든 행정명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명으로 하달되었다.
5.16 직후 임명된 경기도지사가 현역 대령(육사5기, 박창원)이었던 것에 비해, 군정 하에 신설된 초대 군사원호처장이 그보다 높은 현역 소장(군사영어학교1기, 민병권)이었음을 보아도 원호처에 군정이 얼마나 힘을 실어주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원호처의 첫번째 가시적인 성과로서 수원에 직업재활원과 중앙원호원을 만들어 창훈대彰勳臺라고 명명했다.
이로써 휴전 이후 10년 간 국가의 부조 없이 방치되었던 전국의 상이군경 중 직업재활의 의지가 있던 사람들이 수원으로 모여들었다.
50년대 서울 우이동에 있던 "실명의용촌失明義勇村" 역시 수원으로 이전했음은 물론이다. 앞이 보이지 않던 "실명용사"들은 직업재활보다는 요양과 원호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직업재활과 원호의 실태는 굉장히 열악했지만 대한민국의 보훈행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군사원호처는 1985년 국가보훈처를 거쳐 2023년 국가보훈부로 승격된다.
국가보훈부 승격 원년을 맞아 초기 보훈 유적을 돌아보았다.
#수원 #군사원호처 #중앙원호원 #창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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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길 #초기보훈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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