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장에서는 이렇다 할 논급이 아직 없으나, 근자 금관가야 도읍 경남 김해발로 아래와 같은 발굴소식이 부산경남지역 언론 국제신문 보도를 통해 전해졌으니
김해 한림면서 가야시대 철갑옷 출토
대성·양동·복천 외 지역 첫 발굴
- 목곽묘·토기류 등 100여 점도
국제신문 박동필 기자 입력 : 2021-03-30 19:43:00 | 본지 9면
요약하자면 김해시 한림면 퇴래리 공장신축 부지를 가야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했더니만,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초기의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을 확인했으니, 구체로는 가야시대 목곽묘 28기, 석곽묘 3기, 시대 미상 분묘 3기 등 모두 34기가 확인하는 한편 이들에서는 토기류 65건 73점, 철기류는 97건 104점을 수습했거니와
철기유물 중에서는 2호 목곽묘에서 발견한 종장판갑(철갑옷)이 주목할 것을 주문했으니, 그 까닭을 가야시대 권력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현재까지는 금관가야 대규모 고분군들인 김해 대성동·양동리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출토됐기 때문이라 한다. 관련 사진은 저에 첨부한 것을 보아 주기 바란다.
이런 가야시대 철갑옷으로 이번에 발굴한 김해 퇴래리 출토품으로 전하기는 하지만, 그 정확한 출토지점을 모르는 유물이 있었으니, 이번 발굴성과를 통해 기존 전傳 퇴래리 출토품이 실제 이 일대 출토품일 가능성을 높여준 것으로 보아도 좋을 성 싶다.
저 소식을 접하고 이번에 문제가 된 저 발굴성과를 정리한 발굴조사단 공식 보고서를 문화재청을 통해 입수해 분석해 보니, 아래 정리하는 것이 그것이라, 다만, 이 중간보고서는 저 국제신문 보도에서 논급한 2호 목곽묘 종장판갑이 확인되기 전이라,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음미해 줬으면 싶다.
문제가 된 유적은 김해시 한림면 퇴래리 1086-21번지 일원에 분포하거니와, 조사면적은 2천787㎡라 개중 시굴이 887㎡이며, 본 발굴면적이 1천900㎡다. 조사는 올해 1월 11일 이래 현재까지 가야문화재연구원이 실조사일수 38일로 시행했거니와, 조사의뢰기관은 문성이라는 기업체다.
조사경위를 보면 주식회사 문성에스케이 라는 데서 2018년 퇴래리 산5번지 일원에 공장을 건립하기로 했지만 이 일대가 유적 분포지역이라 해서인지 사전 발굴조사를 시행하게 했으니 가야문화재연구원에서 의뢰받은 시굴(2018. 6. 29~동년 7. 9) 결과 9개소 중 5개소 트렌치에서 목곽묘 6기, 석곽묘 1기, 수혈 3기, 석렬 2기를 포함하는 총 12기 가야시대 유구를 확인하는 한편 도질토기편, 노형기대편, 광구소호 등의 유물을 수습함으로써 향후 이 일대에는 정밀발굴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이후 공사는 지지부진했는지, 그 사이 사업시행처가 문성에스케이에서 문성으로 바뀌고 사업구역 역시 확장·변경되어 전체 사업면적이 5,010㎡로 확대되었거니와 이번 발굴조사는 이렇게 해서 이뤄졌다.
이 보고서가 말하는 '현재'가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나 암튼 이번 조사 결과 가야시대 흔적으로는 목곽묘 28기와 석곽묘 3기, 그리고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무덤 3기를 포함하는 총 34기 유구를 확인했으며, 출토유물로는 고배, 유개고배, 노형기대, 단경호, 광구호, 컵형토기 등의 토기류와 소도자, 주조철부, 철모, 철착, 철촉 등의 철기류 다수를 수습했다.
이번 조사지역은 퇴래미산이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에 해당하지만 주변 공장과 서쪽편에 뚫린 도로에 의해 주능선과는 단절한 상태다. 조사지역 북서 쪽에는 소규모 공장이 위치한다.
이번 조사대상 지역은 퇴래리 고분군 영역에 포함되며, 주변 일대로 ‘난개발지역(한림면 퇴래리) 주차장 및 체육시설 조성사업 부지 내 유적’ ‘김해 퇴래리유적’ ‘김해 퇴래리 공장신축부지 유적’ ‘김해 퇴래리(산8번지) 공장신축 추가부지 내 유적’ ‘김해 퇴래리 공장조성부지 유적’ ‘김해 퇴래리(산7) 공장신축부지 내 유적’ ‘고속국도 제600호선 부산외곽순환 건설공사(2공구) 내 유적’ ‘김해 한림면 퇴래리 788-7 제조업소 신축공사 부지 내 유적’ 등과 같은 가야시대 고분군이 발굴조사 성과가 이미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일대는 가야시대 공동묘지인 셈이다.
이것이 조사대상 지역 항공 양태다.
이번에 확인한 가야시대 무덤 분포양상이다. 고고학계에서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무덤은 거의 예외없이 등고선 방향을 따라 장축을 마련했으니, 절대방향으로 보면 동서 장축이다. 예외가 있겠지만, 머리는 동쪽으로 두지 않았을까 싶다.
이걸 보면 주변 턱밑까지 이미 공장이 치고 들어왔다. 목곽묘가 주축이라 하거니와, 목곽묘? 간단하다. 무덤 중에서도 시체를 목곽이라 해서 이중 나무관에다가 안치한 무덤을 말한다.
시체는 관에다가 넣거니와, 이런 관을 이중 삼중 사중 다중으로 만들 적에 관 외곽을 감싸는 바깥 관을 곽槨이라 하거니와, 우리 말로는 덧널이라 한다. 이런 목관에다가 목곽을 쓴 무덤을 목곽묘라 한다. 이런 목곽은 대개 땅에다가 졸라 크게 구댕이를 파거니와 이 구댕기를 광壙이라 하거니와, 그 광은 무너져내림 방지를 위해 거개 돌로 비름빡을 만든다. 이 비름빡 시설을 방처럼 만들어 놓으면 석실묘石室墓라 하고, 그것을 덧널로 썼으면 석곽묘石槨墓라 하는데, 좆또 암것도 아니며 하나도 안 중요하다.
암튼 이런 구조가 특별한 데는 눈꼽만큼도 없다. 간단히 정리하면 시체를 묻고자 땅을 파고, 그 안에다가 시체를 넣은 목관 혹은 목곽을 넣고, 비름빡은 돌로 쌓고 그 위에는 대개 흙으로 봉긋한 표식을 만드는데 이걸 봉분封墳이라 한다.
석관묘 석곽묘? 목관묘 목곽묘? 이 또한 거지발싸개 같은 표현이며 정확한 명명법도 아니다.
암튼 경상도 지역 혹은 남해안 지역 무덤 변화양상을 통해 정리하자면, 기원전후 무렵, 그러니깐 예수가 태어날 무렵 이 지역에는 목곽(덧널)을 썼느냐 아니 썼느냐를 기준으로 할 적에 대체로 목관만 쓴 무덤이 유행하다가 4세기 무렵이 되면 덧널을 쓰기 시작한다. 물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목곽은 고사하고 목관조차 쓸 돈이 없어 전부 거적대기 싸서 지 아부지 엄마 시체 숲에다가 갖다 버렸다.
암튼 저에 의하면 퇴래리 유적에서는 대체로 목곽을 쓴 무덤이 발견되거니와, 그래서 무덤을 쓴 시기로 보면 대체로 4세기 이후 늦잡아도 6세기 초반까지 만든 것으로 본다. 간단히 말해 서기 400~500년 무렵, 지금으로부터 천오륙백년전에 만든 공동묘지로 보자!
이거이 3호 목곽묘다.
이거이 13호 목곽묘다. 바닥에 돌을 좍 깔았다.
이거이 17호 목곽묘다. 바닥은 물론이고 비름빡도 돌로 쫙 벽돌처럼 쌓았다. 돈이 좀 많은 사람이다.
이거이 24호 목곽묘다. 바닥 혹은 비름빡에 이렇다 할 돌무대기가 없다. 돈이 없다.
무덤 고고학 암것도 아니다.
덧붙이건대 철갑옷 썼다 해서 그 지역 문화가 발달했다느니 하는 거지발싸개 같은 시각도 이젠 버려야 한다.
철갑옷? 입어봐라. 본인이 못 견디고 말이 못 견딘다.
암튼 이와 같은 조사성과를 토대로 조사단은 아래와 같은 이번 발굴성과를 정리한다.
1. ‘김해 퇴래리 공장 신축부지 내 유적’은 시굴 및 발굴조사구역으로 구분된다. 시굴조사대상지역의 면적은 887㎡이며, 발굴조사대상지역의 면적은 1,900㎡이다.
2. 조사대상지역은 퇴래미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구릉 말단부에 해당되는데, 조사대상지역 주변의 공장과 서편에 개설된 도로에 의해, 현재는 주능선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이다. 조사대상지역과 접하여 북서쪽에는 소규모 공장이 위치하고 있다.
3. 조사대상지역은 퇴래리고분군①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주변의 반경 300m 이내에‘김해 퇴래리 788-7 제조업소 신축공사 부지 내 유적’,‘ 김해 퇴래리 유적’,‘김해 퇴래리 공장신축부지유적’,‘김해 퇴래리 공장조상부지 내 유적’,‘난개발지역(한림면 퇴래리) 주차장 및 체육시설조성사업부지 내 유적’등 가야시대 고분군이 다수 발굴조사되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諸 유적 전체가 거대한 퇴래리고분군으로 비정되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4. 시굴조사대상지역에서 설정한 피트의 토층 상에서 확인된 복토층의 두께는 약 7m 정도로 현대폐기물 및 콘크리트가 다량 확인되었으며,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대상지역에서는 가야시대 목곽묘 28기, 석곽묘 3기, 시대미상 분묘 3기 등 모두 34기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고배, 유개고배, 노형기대, 단경호, 광구소호, 컵형토기 등의 토기류와, 소도자, 철부, 철모, 철촉, 철착, 유자이기 등의 철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5. 출토유물로 보았을 때, 본 유적의 중심연대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전엽에 이를 것으로 사료된다. 단각의 외절구연고배, 승석문이 타날된 원저단경호, 파수가 부착되지 않은 삼각투창 노형기대, 고식도질토기 단계의 통형고배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하며, 이는 동일유적인‘난개발지역(한림면 퇴래리) 주차장 및 체육시설 조성사업부지 내 유적’과 유사한 결과이다.
6. 이번 발굴조사 상에서 본 조사단이 추정하는 위석식목곽묘와 초기수혈식석곽묘는 모두 5기(구역경계에 극히 일부만 걸친 3호 석곽묘는 제외함)이다. 연접하는 동일유적인‘난개발지역(한림면 퇴래리) 주차장 및 체육시설 조성사업부지 내 유적’에서는 석곽묘 3기만 확인되었으나, 유물 및 유구의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본 유적과 비교가 어려운 상황이다. 5세기 중후반을 시작으로 6세기까지 주를 이루는 석곽묘의 정연함과 유물기종 구성에 비해서 본 유적 내 추정 위석식목곽묘와 초기수혈식석곽묘의 존재는 목곽묘 단계에서 전형적인 수혈식석곽묘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양상을 지시하고 있다. 또한 이혈주부곽식 목곽묘가 확인되었던‘난개발지역(한림면 퇴래리) 주차장 및 체육시설 조성사업부지 내 유적’에 비교하였을 때, 본 유적 내에서는 단곽식 목곽묘만 확인된 점 등의 차이점은 동일유적 내에서 가야시대 고분군의 전환양상과 위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고고학적 방향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7. 이상, 본 유적에 대한 정리가 완료되고 주변유적과의 비교·분석이 이루어진다면, 퇴래리 고분군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학술적 기초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향후 퇴래리 일원의 가야시대 분묘유적 및 취락유적에 대한 데이터가 더욱 많이 축적된다면, 이번 조사성과는 퇴래리 일대의 고대집단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있어 학술적인 기여를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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