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로서의 거란이 어떤 통치체계를 마련했는가를 살피면, 내치와 외치를 부러 구별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경찰과 군대라는 현대 국가 관점에서 보면 내치란 말할 것도 없이 경찰 관련 사무요, 외치란 외부를 통제하기 위한 군대를 말한다.
이 두 가지 체계를 일부러 나누어 다스리려 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거란은 그 주축인 거란족과 이런저런 이유로 유입된 한족漢族 중심 외부를 동시에 통제해야 했다.
이에서 두 가지 층위의 통제책을 쓰는데, 거란은 거란 본래의 유습에 기초한 방식을 쓰고, 한족은 한족에 중국식 통제 방식을 구사했다.
태종太宗에 이르러 중국 제도를 겸용하여 관직을 남南[중국]과 北[거란]으로 나누었으니 국제國制로 거란을 다스리고 한제漢制로는 한인漢人을 다스렸다. (요사遼史 권45 지志 제15 백관지百官志1)
이에서 비롯해서
요국遼國 관제는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으로 나누어 북면北面[곧 북원]에서는 궁장宮帳과 부족部族과 속국屬國에 관한 정사를 다루었고 남면南面[남원]에서는 한인漢人의 주현州縣과 조부租賦, 군마軍馬에 관한 사무를 다루었다. (同上)
하거니와,
이를 간단히 대별하면 상대적인 지리상 위치가 거란이 북쪽, 중국이 남쪽이라는 데서 착안해 북원은 거란 관련 사무를 다루고, 남쪽은 한족 관련 일들을 관장했다는 뜻이다.
또 크게 보면 북원이 국방과 외교 관련 업무, 곧 대외 관련 사무를 관장했다면, 남원은 내치에 주력했음을 본다.
이에서 조금 이채로운 점이 군마軍馬에 관한 사무를 북원이 아닌 남원에 배속시킨 점을 들 수가 있는데, 이를 내치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곧 남원이 하는 일은 북원이 하는 일에 대한 서비스업이라는 측면이 아주 강했음을 본다.
요사 백관지에서는 요나라 관제가 간단해서 국운이 융성했다 하지만, 실제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조금 복잡해서 희한하다.
북원과 남원 이원화한 두 개 조직으로 저리 갈랐지만, 각각에 설치된 관직은 같아서 각각 추밀원이 있고 王이라 일컫는 존재가 있으며, 재상도 있고, 기타 여러 관직이 서로 조응한다.
요遼나라 조관朝官(중앙관직과 관부를 말함)은 북추밀원北樞密이 병부兵部(곧 군사 업무)를 주관하고 남추밀원南樞密이 이부吏部(곧 내치)를 담당하거니와, 북왕北王과 남왕南王은 호부戶部 일을 맡아보며 이리필夷離畢은 형부刑部, 선휘宣徽는 공부工部, 적렬마도敵烈麻都는 예부禮部일을 맡아보며 북부재상北府宰相과 남부재상南府宰相이 그것을 총괄한다. 척은惕隱은 종족宗族에 관한 일을 다스리고 임아林牙는 문고文告에 관한 일을 주관하고 어월於越은 앉아서 국사를 논의하니 이는 삼공三公과 삼사三師를 본뜻 것이다. (同上)
이걸 보면 북부재상과 남부재상이 투톱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북원과 남원이라 불렀을까? 단순히 거란은 북쪽, 한족은 남쪽이라서? 물론 이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상의 이유가 있었다.
(북원北院은) 그 아작牙帳[관부]이 대내장전大內帳殿 북쪽에 있어 북원北院이라 했다. (上同)
이라 했으니 남원南院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부서 건물이 위치한 데가 대내장전大內帳殿 남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대내장전大內帳殿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황제가 정무를 살피는 자리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 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경복궁으로 치환하면 북원은 현무문 바깥 지금의 청와대 자리 정도에 그 건물이 있었고, 남원은 광화문 월대 남쪽 지금의 세종대로 어딘가에 있었다.
거란은 강성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제국을 이룩했지만, 무엇보다 그 지배 상층부를 형성하는 거란족은 쪽수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에 견주어 복속한 한족을 비롯한 이민족은 쪽수가 엄청 많았다.
이는 훗날 여진족에 의한 지배층을 형성하는 청나라도 마찬가지 국면을 초래하는데, 나름 쪽수가 적은 정복인이 쪽수가 엄청 많은 피정복민을 다스리고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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