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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눈가리고 아옹? 돌절구에다 자기 표식을 단 소심한 권오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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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출토 돌절구로 서울대박물관 고고실 상설전시품 중 하나다. 

저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었다. 
 

 
돌절구 석구石臼 stone mortar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는 작은 돌절구가 여러 점 확인되었습니다. 크기로 보아 이것으로 식재료를 가공했다기보다는 차를 보관하거나[茶甁] 약재를 빻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제 주전자, 청자 사발 등과 함께 출토된다는 점에서 중국에서 들어온 차 문화와 관련된 유물로 보기도 합니다. 
 
저런 설명은 권오씨가 관장으로 오기 전에는 없었다. 그러니 저 팻말은 권오씨 의도가 짙게 반영된 그의 작품이다. 

왜?

아마 선생질하신지 35년 정도 되었을 권오영은 동아대와 한신대를 발판삼아 지방을 떠돌다 서울대 국사학과로 전직하고는 박물관장까지 냉큼 먹어버렸는데

일찍이 역사학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양다리 걸치기에 나서 고고학을 병행했으니,

그러다가 한신대 교수 시절에는 된통 걸려 얻어터지기에 정신이 없었으니 재수없게도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을 한신대박물관이 수주하는 바람에 온갖 똥바가지라는 똥바가지는 다 썼다. 

암튼 그렇게 해서 더욱 백제고고학에 매진하게 되는데, 여느 백제고고학도가 그렇듯이 중국을 뻔질나게 들락거리기 시작하고

특히 육조 문화 탐방을 통해 차문화의 중요성을 체득하고는 그 한국적 맥락 적용 차원에서 고민하던 차! 

흑색마연토기인가? 계수호인가? 아마 후자 닭대가리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어랏? 중국에서 보니 차 달이기 도구네?

하면서 냅다 이거다 싶어 그 기능을 두고선 마침내 

백제가 이미 한성시대에 차 문화를 향유했다!! 

이런 논문을 발표했던 것이다. 

나는 이 논문을 높게 치는데, 왜인가? 내가 증오하는 그 양식론을 넘어 기능을 생각한 실상의 첫 한국고고학 시도라고 평가하는 까닭이다. 

저 설명문, 권오영이 썼다! 

짐짓 객관을 가장하여 유물로 보기도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썼지만 눈가리고 아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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