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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다시 생각하는 경애왕의 비극

by 한량 taeshik.kim 2020. 9. 21.

나는 앞선 고찰들을 통해 포석정鮑石亭은 신성한 맹서를 토대로 하는 혼인이 이뤄지는 웨딩홀이었으며, 한편으로는 화랑과 그가 이끄는 무리한테는 종묘와 같은 신성 공간이었음을 주장했다. 그곳은 웨딩홀인 까닭에 남녀 결합을 상징하는 석조 구조물을 형상화한 것이며,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그곳에는 역대 화랑 중에서도 특히나 존경받는 문노와 같은 인물 초상화를 봉안한 제의시설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포석정이 신라시대에는 포석사鮑石祀 혹은 약칭 포사鮑祀라 일컬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성격에서 포석사가 신라 하대로 올수록 유흥시설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웨딩에는 언제나 유흥이 따르는 까닭이다. 

 

경애왕이 참살되기 직전 웨딩피로연을 하던 포석정 

 

이를 통해 우리는 천년왕국 신라가 마침내 종적을 감추고 마는 그 결정적인 사건, 다시 말해 경애왕의 비극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발판을 마련한다. 다름 아닌 이 비극이 일어난 무대가 포석적인 까닭이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애왕본기 4년(927)에 이르기를, 이해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신라를 공격하므로 왕이 고려 태조한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지만, 그가 보낸 구원군 1만 명이 이르기도 전인 그해 겨울 11월에 경애왕은 난을 당하고 말았으니, 상술하기를 

 

 

(이때 견훤이)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가니 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다가 적군이 닥치는 것도 모른 채 허둥지둥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했으니,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쳐 숨었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천을 가릴 것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면서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를 면치는 못했다. 견훤이 다시 군사를 풀어서는 공사公私의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 사람들을 시켜 왕을 찾도록 하니 왕은 왕비 및 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대 진영에 끌려 나오니 왕을 핍박하여 자살토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고 했으니, 이를 볼 적에 신라 조정에서는 견훤이 변방을 침입하기는 했지만, 서울까지 치고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급습을 당한 셈인데, 견훤으로서는 빛나는 승리라 하겠으니, 왕건 구원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신라에 선수를 쳐 버린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를 완전한 후백제의 부용국으로 삼은 셈이다. 

 

한데 이 사건을 보면, 견훤이 신라 서울로 들이쳤을 적에 경애왕은 왕비는 물론이고 후궁, 그리고 친인척, 그리고 공경대부, 나아가 그들의 마누라 자식들과 함께 포석정에 행차하고 있었음을 본다. 예서 분명 삼국사기는 잔치를 베푸는 중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잔치가 비로소 결혼식 피로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 포석정은 웨딩홀이었으니깐 말이다. 

 

유상곡수와는 거리가 먼 포석정

 

하지만 성난 견훤이 웨딩이었다 해서 봐줄 요량은 아니었으니, 뭐가 단단히 신라에 맺힌 것이 있었던 듯 피의 복수를 감행했다고 한다. 저 악랄한 복수가 다분히 왕건을 추켜세우기 위한 과장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거니와, 아무튼 멍하니 있다가 당한 경애왕이 애처로울 뿐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제 포석정을 둘러싼 신화, 곧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그림자도 지워 버려야 한다. 저기다가 술을 흐르게 하고서는 잔을 띄어놓고는 시인묵객들이 흥취를 일삼았다는 그런 유상곡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웨딩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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