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어떤 판사 양반이 직을 관두면서
내가 무슨 조선시대 사또냐 이런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사법체계를 우습게 보는 언설로,
비단 이 판사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실제로 사또 재판이라는 말도 있다.
엉터리 재판, 판사 지 맘대로 하는 재판을 말하는 것일진대,
그만큼 조선시대의 관리와 사법체계에 대한 비하가 깔려 있다 하겠다.
그러면 조선시대 재판은 정말 그렇게 엉터리였을까.
최근 필자는 구한말 검시 자료를 의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은 대한제국의 관리들이 굉장히 유능하고 부지런했다는 것이다.
구한말 정부 관리, 하면 무능하고 게으르며 애국심도 결여된 그런 존재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이들은 살인사건이 나면 며칠만에 바로 현장에 나타나 증인 심문과 검시까지 했고, 초검이 끝나면 며칠만에 바로 재검을 실시하는 등
요즘도 한번 재판하면 3심까지 몇년씩 걸리는 재판이 부지기수인데 지금 판사들보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훨씬 부지런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검시 보고서에 기록한 내용들을 보면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뭐 요즘도 판사 하면 수재들이 아니면 되기 어렵지만, 따지고 보면 지방수령들 중에는 대과 급제자도 있어, 수재들이 지방관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과 급제자 하면, 식년시로 3년에 33인이라. 일년에 11명씩 뽑는 꼴이니, 지금 판사들이 통과한 시험도 따를 수 없는 경쟁률이었다 하겠다.
각설하고-.
이들 대한제국의 관리들은 나라가 망하고 난 뒤 절반정도가 조선총독부 관리로 채용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중 다수는 하급관료를 전전하다가 퇴임한 것으로 안다.
이들의 능력을 볼 때, 그렇게 인생이 풀리는 것은 정말 억울했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아마 각계 각층에서 활약했을 것이고, 그 안에서 한국의 나쓰메 소세키,
한국의 후쿠자와 유키치, 한국의 키타사토 등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수백만 나오는 것보다 나라가 안망하는 게 장땡이다.
나라가 한번 망해 버리면, 각 분야에서 자기 역량을 발휘해야 할 인재들에게 딱 한 가지 화두,
독립운동 할래, 아니면 매국노가 될래 이 화두 하나만 주어진다.
인생을 살아가는 수백 수천의 선택지를 가지고도 만족 못하는 지금 세대 사람들이,
딱 한가지 선택지, 독립운동과 매국노 하나만 달랑 손에 쥔 불쌍하기 짝이 없는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젊은이들의 고민을
너무 쉽게 재단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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