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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도봉서원기로 보는 창건기 도봉서원 레이아웃

by taeshik.kim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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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기로 유추해 본 초창기 서원 레이아웃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 이이李珥

서원書院을 세우는 까닭은 본래 장수藏修하기 위함이니, 그에 아울러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전례를 높이기 위함이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그 고장 선생(鄕先生) 중에서 후학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이를 찾아내 사당을 세워 공경을 다하니 그리하여 많은 선비가 현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정암선생(靜菴先生) 조 문정공(趙文正公)은 한산漢山 사람이다. 한산은 본래 양주楊州에 속했지만 지금은 도성都城에 편입됐다. 양주 관아 남쪽 30리 지점에 산이 있어 이름하여 도봉산道峯山이라 하며, 거기에 영국(寧國)이라는 골짜기가 있으니, 옛날에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니, 사찰은 폐허가 되었지만 골짜기는 그 이름을 따랐다. 선생이 젊을 적에 이 골짜기 시내와 돌을 무척이나 좋아해 오가며 쉬기도 했으며, 조정에 들어가서도 공무의 여가를 빌려 말을 타고 와서는 노닐기도 했으니 현재까지도 이곳 늙은이 중에 더러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만력萬曆 계유癸酉(1573. 선조 6) 겨울에 목사 남후 언경(南侯彥經)이 이 골짜기에 들렀다가 보고는 선생의 자취에 감개하여 동네 선비들에게 자문하여 공경하고 사모할 장소를 만들자고 하니 뭇사람의 뜻이 합치됐다. 이에 즉시 절터에다가 사우祠宇를 세움으로써 서원書院을 계획하니 고장 사람들이 발벗고 나서고 갖가지 기술자가 힘을 쓰니 이듬해 갑술甲戌(1574. 선조 7) 여름에 사우와 서원이 완공을 고하게 되었다.

사우는 북쪽에 자리를 잡았으니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보익을 삼았다. 서원은 사우 남쪽에 있으니 그 중간에다가 강당講堂을 설치하고 두 협실夾室을 날개로 삼았다.

전랑前廊이 있어 계곡을 베개로 삼고 전랑 한 쪽에 문이 있으니 지형을 따랐다. 목조 공사가 대강 끝났지만 나머지 잡다스런 일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남후南侯 언경이 병으로 사직하자 목사로 잇따라 온 사람이 이공 제민李公齊閔과 이후 정엄李侯廷馣이었으니 그들이 일을 이어 중단이 없었다. 이에 선비들을 먹이기 위한 시설과 책을 보관할 장소, 사우를 위한 제물을 차릴 주방이 차츰 완성을 보았다.

공사가 6년을 넘긴 기묘己卯(1579, 선조 12) 봄에 마침내 모든 일손을 떼고 이곳이 낙성을 보게 되었으니 서원의 선비인 안창安昶이 많은 선비가 청한다면서 나 이이에게 기記를 써달라 했다.

나 이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문형文衡을 맡은 대가가 한둘이 아닐진대 꼭 해변가 깡마르고 병든 사람의 붓을 빌려 유림의 성대한 일을 펼쳐 보이고자 하니 그 뜻은 어디에 있겠는가?

나 이이가 선생의 보은을 입어 선생이 이룩한 학문의 찌꺼기라고 거칠게나마 들었다고 잘못 생각해서가 아니겠는가?

부끄럽고 부끄러워 감당할 수 없다.

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湊者。有年數矣。珥未克一觀。自恨嬰疾。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間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柱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祥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具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表表異衆云。是年暮春旣望。後學德水李珥。記。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四
[記]
道峯書院記 李珥

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道峯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間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彥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仰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役粗完。凡百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昶。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槁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湊者。有年數矣。珥未克一觀。自恨嬰疾。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間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柱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祥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具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表表異衆云。是年暮春旣望。後學德水李珥。記。


초창기 서원 레이아웃 그림 by 김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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