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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무덤이 짓누른 석촌동의 주둥이 깨진 닭대가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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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박물관, 석촌동 고분군 널무덤 발굴현장 설명회
김준태  / 2022-11-15 06:00:05

 

 

한성백제박물관, 석촌동 고분군 널무덤 발굴현장 설명회

(서울=연합뉴스) 김준태 기자 =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은 15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에서 공개 설명회를 연다고 밝혔다.8호 적석묘(돌무지무덤) 아래에서 올해 발견된 8기의

k-odyssey.com

 

 

아래 한성백제박물관 보도자료를 첨주하게 되겠지만, 이번 성과를 간략히 정리하면 

석촌동고분군이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대형 돌무지무덤, 고고학계에서 흔히 적석총積石塚이라 부르는 그 네 모난 모양 무덤 아래에서 당연히 그 이전 시대에 만든 새로운 양식의 무덤인 나무널무덤, 곧 목관묘木棺墓가 드러나고, 그걸 팠더니만 동시대 중국에서 수입했음이 분명한 거무틱틱 닭대가리 모양 주둥이 갖춤 중국제 청자인 계수호鷄首壺가 발견됐다 

이거다. 

이번 발굴을 통해 아주 분명한 지층 분포를 통해 한성도읍기 백제는 그 왕가의 공동묘지를 석촌동에 쓰면서 돌무지무덤 대따시 무덤들을 쓰기 전에는(혹은 적어도 그와 동시기에) 나무널무덤을 만들어 썼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왜냐? 돌무지무덤이 나무널무덤을 짓누른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 발굴양상을 보면 적석총 아래에서 목관묘가 노출함을 본다. 이 의도적인 겹치기가 무엇을 말할까? 목관묘를 만들던 종족 혹은 집단을 적석총 집단 혹은 종족이 깔아뭉갰다고도 볼 수 있고, 그러는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교체일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어차피 새로운 무덤 쓰야는데 적당한 묘지가 없고 해서 옛날 공동묘지를 재사용했다고도 간단히 볼 수 있다.
복잡해. 13호와 12호와 6호 목관묘는 일정한 위치 양상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한다. 7호와 11호가 그렇다. 이 두 뭉치끼리는 일치하는 흐름이 없다.

 

 

한데 이 나무널무덤에서 계수호가 발견됐다? 이 점은 이런 수입산이 발견될 때마다 고고고학계가 내세우는 전가의 보물, 곧 활발한 국제교류를 증명함을 실증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겠다 싶다. 

이 계수호는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 특히 장강 유역 남조 영역에서는 적지 않은 숫자가 발견되거니와, 이런 양상을 일찍이 나는 '닭개다리들의 향연'이라 부른 적이 있다. 

이 계수호는 무엇보다 거무틱틱하면서 반질반질한 빛이 아주 인상적인데 물론 꼭 거무틱틱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청자 특유의 푸른빛을 내는 유물이 중국에서도 많다. 다만 한반도에서 출토하는 계수호는 내 기억에 거무틱틱 일색이 아닌가 하는데, 이건 확인해 봐야 한다. 

이 계수호는 중국에서는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애용한 것이기에, 그 모양 변화를 두고서 만든 시기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니, 내가 들은 말로는 모가지가 타이슨처럼 짧으면 초기, 모딜리아니 얼굴 그림처럼 길쭉하면 후기, 뭐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걸 봤고, 이런 분류가 그런 대로 편의성이 있다. 

 

이걸 보면 목관은 남북 중심축으로 놓되, 북쪽이 시신 머리를 뒀고, 계수호는 그 시신 머리 쪽에 안치했음을 본다. 죽은 사람 기준으로 머리 위 왼쪽인 셈인데, 목관 밖 이른바 충진토에 둔 듯하다. 저 상태로 엎어진 채 넣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세웠을 것이다.
목관묘에서 출토된 양상과 그 실물, 왜 계수호라 하는지 알 만하다. 문젠 주둥아리 일부를 일부러 깨뜨렸다는 사실이다. 한데 깨진 단면을 보니 그리 오래된 듯 보이지는 아니한다.

 

문제는 기능. 이와 관련해 한국고고학은 기능을 패대기쳤거니와, 이 역시 그런 신세를 변치 못하다가 동아대 거쳐 한신대 찍고 지금은 서울대 국사학과로 간 권오영 교수로 기억하는데, 차 끓이기 도구라는 발표를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름 참신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다만, 나는 계수호와 관련해 어떤 맥락에서 저걸 구더기 넘쳐나는 시체랑 묻어둬야 했는지가 여전히 의뭉스럽다. 저 계수호는 내 기억에 한반도에서는 무덤에서만 나왔다. 예외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세엔 지장없다. 

그렇다면 왜 백제인들은 저 중국제품을 수입해서, 것도 거무틱틱만 수입해서 무덤에다 썼는가? 단순히 귀한 제품이라 그랬을까? 귀하다면 방구석에 놓고 완상할 텐데 왜 무덤에? 권 선생 지적이 정확하다면 그렇다면 시체는 생전에 차를 즐겼을까? 그것일까? 

이런 탐구는 여전히 큰 구찌로 남았으며, 누군가는 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이번 계수호가 무덤 속 본래 자리에서 출토된 점을 주요한 성과로 박물관에서는 꼽는데, 이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내가 말한 저 의뭉함을 푸는 단서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내부에 무엇인가 남은 흔적이 있다면 그걸 분석했거나 분석 중일 텐데 난 그것도 궁금하다.

 

생후 2개월 남자아이 오줌구멍 같다. 저 작은 주둥이에서 그 기능을 짐작하는 단서를 포착할 수도 있다.

 

 

저런 주전자야 말할 것도 없이 액체를 담아 보관하거나 수송하기 위한 것이라, 문제는 어떤 액체인가 하는 점이다. 권오영은 차를 거론했지만, 또 그것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겠지만(아마 중국 쪽 발굴성과와 분석결과를 참조했을 법한데???) 그와 관계없이 저런 용기는 말할 것도 없이 사케나 차 같은 투명 액체 담기용이다. 정종 부어 놓고 적당히 따숩게 해서 한 잔 빨면 딱 좋은 그거다. 

문제는 이걸로 모든 것을 해명하는가? 나는 약물에 무게를 둔다. 이건 물론 아직은 근거가 없다. 다만 술 혹은 차 역시 약물 일종이라는 사실 하시何時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렇고 저 무덤 도굴 피해는 전연 안 봤을 테고, 그럼에도 계수호 양상을 보면 주둥아리 일부가 깨져나갔음을 본다. 무덤이 훗날 붕괴하는 과정에서 타격된 것인가? 아니면 애초 무덤을 쓸 적에 저리 깨뜨려 넣은 것인가?

 

보다시피 계수호는 코딱지 만하다. 계수호가 발견된 지점이 시신 머리 쪽.
시대변화에 따라 보여주는 고고학 현장도 다 달라졌다. 사람 안 들어가면 안 된다. 이런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김태식이다!!!

 

나는 대뜸 이른바 훼기毁器라 해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사는 영역을 다름을 표시하고자 그 생전 기물을 일부러 박살내는 그 전통으로 짐작했거니와, 조사단에서도 그리 판단한댄다. 

자연 붕괴에 의한 타격이면, 당연히 그 현장 바닥에서 그 떨어져 나간 도자기 쪼가리가 발견되어야 하지만, 안 됐다!!! 

깨뜨린 나머지 도자기 쪼가리는 어찌했을까? 어딘가는 폐기했을 것이다. 어디에서 깨뜨렸을까? 나는 무덤을 쓰는 그 현장에서 기술자가 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저 현장 어딘가에 그 쪼가리가 있다! 이걸 찾아내면 대박이겠지만 고고학이 사람 바람대로 되는 거 봤는가? 

 

아마 같은 데서 나온 듯한데 귀걸이다. 누가 봐도 시체용이지 산 사람을 위한 건 아니다.

 

 

한성백제박물관,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 발견…15일 현장설명회 개최

- 한성백제박물관, 15일(화)「서울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개최

- 초대형 연접식 적석총 아래에서 무리 지어 발견된 널무덤의 다양한 모습 발견

- 8호 적석묘 아래 12호 널무덤의 주인은 금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를 걸고 중국제 흑유계수호(흑유 닭 모양 항아리)를 껴묻거리로 갖춘 백제 한성의 지배계층

 

□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유병하)은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하고 오는 11월 15일(화) 오전 10시, 오후 2시에 주요 발굴조사 성과를 시민에게 공개하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사적)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 이번 발굴 성과는 8호 적석묘 아래에서 무리 지어 발견된 널무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백제 한성 왕실 묘역의 경관 변화를 증명하는 다양한 자료를 추가 확보한 것이다. 

 

요 출토위치가 좀 묘하다. 머리 쪽이며 목관 바깥인 듯하다. 이게 뭔가?
볼짝없이 귀걸이와 목걸이 구슬을 통해 시체 위치를 판가름한다. 암것도 아니다.

 

 

○ 한성백제박물관은 지난 2015년부터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추진중이다. 초대형 ‘연접식 적석총’을 확인하여 백제 왕실 장례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8호 적석묘 아래에서 조사된 12호 널무덤의 주인은 금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로 치장했고 껴묻거리로는 중국제 흑유계수호(흑유 닭 모양 항아리), 백제 토기 항아리를 갖추고 있다. 특히 금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는 착장된 상태이며 흑유계수호는 제 위치에서 온전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는 백제 지배층의 장례문화와 묘제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 12호 움무덤의 주인은 백제 왕실에 소속된 지배계층으로서 유리구슬 목걸이와 금귀걸이로 치장하고 당시 중국에서 수입된 청자를 소유할 수 있었다.  백제 왕릉 묘역에 무덤을 만들어 사후에도 생전의 위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8호 적석묘 아래에서 조사된 중국제 흑유계수호(흑유 닭 모양 항아리)는 한성백제박물관 개관 10주년 특별전시회(2022년 10월 27일∼2023년 1월 29일)에 출품 중이다. 이번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는 유리구슬 목걸이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과 유적의 조사 과정을 볼 수 있다. 

 

이 발굴현장은 볼수록 미궁이라 어지럽기만 하다.



□ 유병하 한성백제박물관 관장은 “향후 발굴조사 성과를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여 백제 한성 왕릉지구의 세계 유산적 가치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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