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라는 이름 자체는 중국인이 붙이지는 않았지만
이를 실크로드라고 부를 때 그 이름 자체에는 중국인의 자부심이 있다.
비단이 얼마나 귀했으면 그 길을 비단길이라 불렀으랴.
비단 뿐 아니라 도자기도 그렇고, 중국이 비교우위에 있던 물건들이 이 길을 타고 서역으로
더 멀리는 유럽까지 건너갔다고 믿는다.
따라서 마왕퇴에서 나온 비단 옷과 백서와 백화 재질이 된 비단에 대한 시각 역시
이 물건들이 대단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에 대한 해석에는 반드시 "이 당시 중국의 비단 제조 기술이 고도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라는 말이 꼭 따라온다.
이 말 이면에는 이렇게 대단하기 때문에 결국 이 비단을 구하려 전 세계가 안달했고
비단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으로 갔다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이 말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왕퇴 비단옷과 백화 백서의 재질은 지금봐도 대단하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독보의 수준에 올라섰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왕퇴 유물에서 또 한 가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은
비단 외에 보이는 여러 가지 유기물들, 그리고 예를 들어 백화에 그려진 말 같은 것들.
마왕퇴 할매가 드셨다는 여러 가지 향신료들.
이들 상당수는 바다를 따라왔건 실크로드를 따라왔건 간에 서방에서 들어온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마왕퇴 유물들은 실크로 상징되는 중국 문화의 서방 전파를 웅변함과 동시에,
서역으로 상징되는 서방 문화의 중국내 유입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마왕퇴에서 보이는 소, 말, 닭 등 동물들은 모두 서방 내지는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으로 흘러 들어온 것들이다.
향신료 기원은 중국이 아닌 것들이 섞여 있다.
곡물과 과일도 마찬가지다.
명확히 서역 기원 곡물들이 마왕퇴에서는 보인다.
아마도 서역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이 말은 뭐냐? 마왕퇴는 동서 교역의 증거를 볼 수 있는 유적이지
결코 위대한 중국문명이 전 세계를 압도하던 흔적,
한 가지만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이라는 점-.
적어도 중국 밖에서 이 발견을 해석해야 하는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좀 더 냉정하게 마왕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실크로드는 쌍방간 교역이지 결코 중국의 일방적 문화 전파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셀수 없는 숫자의 과일이 서방에서 흘러들어왔고
동물도 마찬가지였다.
한대 문화가 이처럼 화려해진 이면에는 서역과의 교역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라는 점,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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