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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꾸와 열라리나 바까야로데싯따.
머리를 남쪽으로 둔 이유를 이제야 풀다니.
해직 직후 직설 무령왕릉 단행본 원고를 막판 손질하던 과정에서 2016년 3월 25일 나는 내 페이스북 계정에 저와 같이 적으면서
아래 두 도판을 제시했다.
도판1이 무령왕이 죽어 지금의 공주 송산리고분군 이른바 공주 백제왕릉원에 묻힐 상태의 묘실 배치도요
도판2는 그로부터 3년 뒤 무령왕비가 죽어 같은 무덤에 왕비가 매장될 때 모습을 간단히 시각화한 것이다.
결국 이 무덤은 1971년 발견 개봉 당시 도판2와 같은 상태로 발견됐거니와
이것이 심대한 두 가지 문제를 양산했는데
첫째 남녀 위치가 바꼈고
둘째 머리 방향이 바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동아시아 예제에 의하면
첫째 부부를 합장할 적에 남자는 서쪽, 여자는 동쪽으로 가야 하며
둘째 머리는 북쪽에다 두고서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
무령왕릉은 명백히 이 두 가지를 모두 배신했으니 나는 저 의문을 도대체가 풀 수가 없어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나만이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도 고민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해답을 풀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나는 어찌 돌파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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