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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무령왕릉 등관대묘登冠大墓 해독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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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무령왕 묘지석

 

 

내가 무령왕릉에서 몇 가지 난제로 꼽은 것이 있다.

첫째, 묘권墓券과 관련해 우선 그에 보이는 '등관대묘登冠大墓' 문제를 어케 보느냐였고, 다음으로 '입지여좌立志如左'의 '左좌'를 어케 보느냐가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 묘권 4장의 연결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죽은 무령왕과 묘지墓地를 매매한 토백土伯 이하 무수한 지하 세계 신들을 어찌 봐야 하는지 문제가 있다.

나는 이 네 가지 중 처음 세 가지는 풀었다고 본다. 남들이 이를 인정하느냐 아니 하느냐 하는 문제는 남았거니와, 저들 문제 하나를 풀 때마다 나로서는 유레카를 외쳤다는 말은 확실히 해 둘 수 있다.

 

 

이른바 무령왕 묘지석

 

 

등관대묘 문제는 실은 내가 《유종원집柳宗元集》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오수형·이석형·홍승직 세 중문학도가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돈, 그러니깐 국민세금을 꿀꺽 하고는 낑낑대다 겨우 《유종원집》을 완역해 도서출판 소명출판에서 냈다.

이는 유종원柳宗元(773~819) 전집이라, 당연히 이에는 당대의 문단을 사로잡은 유종원이니만큼 그가 손댄 죽은자들의 행장이 무수하게 실려있었거니와, 이상하게도 이런 행장에는 '대묘大墓'라는 표현이 자주 보였다.

 

 

홍승직 등 역주 《유종원집》(소명출판, 2009.7.31)

 


이 대묘를 접하고는, 나는 그 문맥 분석에 들어갔다. 대묘가 과연 무엇이기에 죽은 자들을 매양 대묘로 모신다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증폭해서 일었다.

이 전집 행장들은 장점이 있다. 특정 집안 사람들 행장을 모조리 유종원이 썼더라. 그에 더해 죽은 사람들이 시기도 다르고, 죽은 장소도 달랐다. 한데 그들은 언제나 장안의 대묘로 시신을 운구해 가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홍승직 등 역주 《유종원집》(소명출판, 2009.7.31)

 

 

그런 대묘라는 말들이 출현하는 텍스트 공간을 죽 배열하고 나니, 마침내 의문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가족공동묘지를 대묘大墓라 했던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나는 무령왕 시대와 좀 더 가까운 시대 묘지명 분석에 들어갔다. 위진남북조시대 묘지명 집성자료집들을 모아놓고 대묘라는 말이 보이는지, 보인다면 어떤 뜻인지 점검해 봤다.

보니 역시나 대묘는 가족공동묘지를 뜻했다.

 

 

졸저 《직설 무령왕릉》(메디치미디어, 2016)

 

 

이제 숨통을 끊어야 했다. 마지막 숨통을....

무령왕과 동시대를 살다간 사람의 저술을 구득했다. 이때 내가 주목한 남조시대 문사가 도홍경陶弘景(456~536)이었다. 양梁 무제武帝 소연蕭衍(464~549)이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칭송해 마지 않은 그 도홍경은 무령왕과 동시대를 살다갔다.

그의 저술 단행본은 몇 종이 전하거니와 개중 《진고眞誥》를 선택했다. 진고....글자 그대로는 하늘 혹은 신선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 문헌...지랄맞다. 판타지다. 뽕 혹은 마약 맞고 접신 강신한 경험을 서술한 것이니 오죽하겠는가?

 

 

졸저 《직설 무령왕릉》(메디치미디어, 2016)

 

 

남악부인南岳夫人 위화존魏華存(251~334)이라는 요망한 상청파上淸派 도교 교단 창시자가 교단을 개창할 무렵 천상에서 강신한 신선들이 남긴 말들을 정리했다는 이 《진고眞誥》가 어찌나 어렵든지, 지금은 다시 쳐다보기도 싫다.

한데 이 《진고眞誥》 부록이 있으니, 특정한 집안 이야기가 있다. 그에는 간단한 약력과 더불어 그 사망에 즈음해 어디에 묻혔는지를 기록한 대목이 있다.

이에서 바로 나는 '大墓'라는 말이 서너 군데 출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분석하니 모조리 가족공동묘지였다.

이제 답은 풀렸다. 등관대묘는 '등관登冠'이라는 이름(지명)의 가족공동묘지였다.

무령왕은 죽어 일정기간 빈소에서 모시고 조문객을 받는 빈殯 기간을 거쳐 지금의 송산리 고분군에 안장했다. 이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가의 가족공동묘지였고, 더구나 그 이름이 관冠을 씌운 모습을 닮았다 해서 등관登冠이라 불렀기에 등관대묘登冠大墓라 했던 것이다.

 

 

홍승직 등 역주 《유종원집》(소명출판, 2009. 7. 31)

 

 

이런 성과를 나는 부산대 중문학 관련 무슨 연구소 기관지에 투고했다. 아마 2008년 무렵이 아닌가 하는데 그 무렵, 이 대학 고고학과 양은경 선생이 잡지를 맡아 논문 수집에 낑낑거릴 때, 던질 논문 하나 없냐 하기에, 그 무렵엔 양에게 신세진 것도 적지 않아 그걸 갚는 셈 치고 투고했다.

북경대 출신인 그가 중국 답사에 몇 번 동행했는데 그때마다 고된 통역을 마다 않았고 그 무렵 언젠가는 부산대 특강에 초대해준 적도 있었다.

등관을 지명으로 본 선학은 있었다. 무령왕릉 발굴보고서에도 실린 그의 이런 주장은 이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하곤 했다.

왜 그랬던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상, 그리고 한문 문리에 의해 등관은 지명일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지만, 왜 그러한지는 그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무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도 대묘가 무엇인지 풀지를 못했다. 다른 누구보다 이런 임창순이 다시 살아난다면, 그리하여 내 주장을 본다면, 너가 맞다 맞짱구를 쳤으리라 생각해 본다.

(June 6, 2017 at 10:0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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