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저런

문맹과 까막눈, 그리고 가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9. 13.
반응형

문맹文盲이란 고급진 말보단 까막눈이라 해야겠다. 그제 어느 방송 프로를 보니 손녀가 할머니한테 한글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더라.

1921년생 선친은 당신 이름도 쓸 줄 몰랐고, 엄마는 이제 계우 당신 이름은 쓰고 숫자는 읽으며 눈치보니 한글은 요샌 때려맞춰 읽는다. 엄마의 변화가 조금 특이한 점이 있는데 완전 까막눈이었다가 전화가 집에 들어오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턴가 보니 동네 사람이나 친척들 전화 번호가 이름과 함께 적히기 시작하더라.

 

1962년 문맹퇴치 한글보급운동



나랑 배가 다른 죽은 형은 중학교 다니다가 학교가 싫다고 도시로 도망쳐 대구니 진주니 하는 데를 전전한 모양인데, 1년에 한 번 정도 집으로 편지를 부치곤 했다. 배운 것 없는 이 형이 어디서 줏어들었는지 매양 편지 첫머리는 부모님 전상서라는 구절로 시작했다.

엄마 아부지야 까막눈이니 그걸 내가 읽어드렸다. 누나들더러 읽어라면 맨날 도망치는 바람에 내가 그 일을 했다. 그 편지 읽기가 그리 싫을 수 없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고향인지 아니면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난 형은 병역기피자였다. 그때만 해도 군대가서 꽤 많은이가 죽거나 병신될 때였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군대는 죽어라 싫다며 도망을 쳐댔다. 병역기피자 집으로 순사들이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쳤다. 일 나가면서 엄마 아부지는 나한테 신신당부했다.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형이 어딨냐 물으면 모른다 하라고 그리 신신당부했으니, 실제 순사들한테 나는 그리했다. 그런 형이 잊을만 하면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편지를 부쳐온 것이다.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



결국 나중엔 붙잡혀 감옥살이까지 했을 것이로대 그래도 형은 끝내 군대를 가지 아니했으니, 나는 그때 그런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했으므로 그는 그런 삶을 살다 결국은 1987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듣자니 나가선 공사판을 전전하기도 한 모양인데 훗날 큰누나한테 들으니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도 일했다 한다.

가난, 문맹..

이가 갈린다.

세상을 향한 분노로 점철한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아니된다. 내가 정치를 하지 않는 이유다. 내가 정치를 했다면 두 가지 길이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 아니면 이명박의 길이었을 것이다. 이걸 마누라는 알더라. 노무현을 보며 매양 그랬다.


"저 사람 보면 당신 모습이 그리 많이 비쳐"

혹자는 문재인을 노무현 계승자라 하는데, 내 보기엔 결이 완전히 다르다. 겉만 비슷하거나 같게 보일 뿐이요, 그 속내 파고 들면, 글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노무현 정신세계를 안다고 생각한다.

(2018. 9. 13)

****

6.25 삐라. 문맹자가 많아 만화로 그렸다. 

 

지난 대선 때인가? 어느 대권 후보가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한쪽이 까막눈이라 해서 팔아먹었다. 그만큼 간난한 가운데서도 본인은 자수성가했음을 강조하고 싶었으리라. 

그런 장면들을 목도할 때마다, 나는 그이에 대한 분노가 치밀기도 했으니,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소학교 문전에도 간 적 없는 까막눈이었기 때문이었거니와, 그럼에도 그런 그를 향한 동정도 없지는 아니했다. 

그랬다. 그 야릇한 감정이란, 옴팡옴팡 문득문득 쳐오르는 까닭 모를 분노가 일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일까 그때도 물었고 지금도 묻는데, 막연히 세상에 대한 분노라 해 둔다. 

둥글게 둥글게 살자 거듭거듭 다짐하지만, 잘 되지 아니한다. 

몇번 한 말이지만, 입사지원서 등등에 부모님 학력난을 적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두 군데 모두 점을 찍어야 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거기다 대졸이라 써도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그게 내키지 아니하면 고졸이라고 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막급하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