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이 익산시와 함께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산124-1번지 일대에 소재하는 삼국시대 초축 산성인 미륵산성이라는 데를 판 모양이라, 그 성과 중 일부가 공개되었다.
조사 목적으로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유적의 진정성 있는 정비와 관리방안을 수립하고, 미륵산성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을 표방한다.
이번 조사를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이 맡긴 모양이라, 저 주소 일대 1천803㎡를 지난 3월 7일 이래 오는 8월 1일까지를 기한으로 팠더니만, 토루土壘와 수 차례 고쳐 만든 석축 물 저장 시설을 확인했다고 한다.
토루? 별거 없다. 흙으로 쌓은 둔덕이다. 성벽 같은 것을 말한다. 흙담장이다.
이번 조사 이름이 ‘익산 미륵산성(평탄지) 정비사업부지 내 문화재 발굴조사’라, 그 성격을 엿볼 수 있겠다.
산성 안 평탄대지는 볼짝 없이 건물 흔적이라든가, 그것을 지탱 운영하기 위한 연못이 나오기 마련이라, 이번에도 예외는 없다.
조사 결과 드러난 토루는 단면을 짤라 보면 반원형이고 너비 9.8m에 현재 높이 3.1m로 드러났다고. 이런 토루가 이번 조사에서는 약 77.3m 구간이 노출됐다.
요새 한국 고고학은 이런 성벽 축조 기법 운운하며 올인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번 토루도 그런 설명이 빠질 수가 있겠는가? 조사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성질이 다른 흙을 사용하여 교차로 쌓고 중간에는 토류석을 시설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경사 성토를 하는 등 당시의 축조 기술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성토? 토류석? 역시 암것도 아니다. 성토란 盛土니, 글자 그대로 채운 흙 혹은 흙을 채운다는 뜻이다. 이걸 조사단은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며 쌓아 올리는 방법”이라 했지만 오류다. 이걸 성토라 할 수는 없다.
토류석土留石은 “지하 구조물을 만들 때 측면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돌”이라 하는데, 그냥 돌이라고 하면 되지 왜 굳이 이런 말을 전문용어랍시고 만들어 쓰는지 나로선 이해불가다.
이번에 확인했다는 연못은 조사단 추정에 의하면 최소 4차례 고침이 있었다는데
▲ 1차는 공중으로 부양해서 내려다 본 모습(이하 같음) 원형이며 지름 7.5m, 높이 0.6m 규모로 4단 정도 ▲ 2차는 네 모서리를 둥글에 만 말각방형抹角方形(이런 말 쓰야 하니?)이며 남북 길이 3.5m, 높이 0.6m 규모로 역시 4단 정도 ▲ 3차는 직사각형으로 남북 길이 7.8m, 동서 너비 6.5m, 높이 1.5m 규모로 7단 정도 ▲ 4차는 정사각형에 가깝고 동서 너비 5.6m 규모로 1단만 남았단다.
이를 돌로 테두리를 돌리고 물을 저장하는 시설이라 해서 조사단은 석축 저수조 라는 말을 썼지만 간단히 연못이다.
그 안에서는 삼국시대 토기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보이는 것들인 큰 항아리와 평기와 등이 출토됐댄다.
미륵산성은 미륵사 터를 병풍처럼 막아선 미륵산(해발 430.2m) 정상과 동쪽 경사진 데다가 만든 이른바 포곡식抱谷式 산성이라 하는데, 포곡식이건 테뫼식이건 단 하나도 안 중요하다.
북쪽에는 낭산산성, 남동쪽에는 선인봉산성과 당치산성을 바라보며 동쪽으로는 용화산성과 천호산성으로 연결된다.
뭐 현장 사정을 아시편 편하겠거니와, 저짝에서 보면 사방을 조망한다.
측량 결과 성벽은 총둘레 1,776m이며 공중 부양해서 보면 장방형에 가깝지만 불규칙하다.
현재까지 미륵산성은 1990년 이래 총 3차례 발굴조사가 있었으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차 조사 : 1990. 07. 03 ~ 1991.02.25. 동문지, 옹성, 치성 확인.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정밀발굴조사
2차 조사 : 2004. 06. 29 ~ 2006. 03.18. 건물지, 집수정, 남문지 확인. 원광대학교박물관 정밀발굴조사
3차 조사 : 2015. 05. 26 ~ 2015. 07. 23. 건물지, 굴립주 건물, 치성 확인. (재)전북문화재연구원 정밀발굴조사
더불어 작년 4차 조사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이번 발굴을 위한 맛배기인 시굴조사였으니
2022. 09. 26 ~ 2022. 11. 17. 익산 미륵산성 내 평탄지(Ⅰ~Ⅳ구역)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모든 구역에서 건물지와 관련된 유구(초석 및 적심석, 석축유구)와 성토층 등이 확인됨. 유물은 삼국시대 개배편, 직구호편과 통일신라시대 대호편 및 평기와 등 확인. (재)전북문화재연구원
암튼 종래 3차에 걸친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문(동문과 남문)이 흔적을 드러냈고 기타 항아리 혹은 나무 옹이 모양으로 밖을 향해 툭 튀어나온 시설인 옹성甕城과 그와 비스무리한 외부 돌출 시설이나 조금은 성격이 다른 치성雉城, 그리고 여타 건물터가 드러났으나 백제시대 흔적은 좀처럼 보이지 아니해서 이짝에서는 곧 죽어도 백제 출현을 갈망하는 사람들 애를 태웠다.
대신 백제시대 토기 쪼가기는 다수 발견되고, 나아가 이번에 조사한 미륵산성 정상 장군봉 아래 평탄 대지에서도 ‘금마저金馬渚’ 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수습된 적이 있어 언젠가는 백제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품게 한 곳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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