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천후 친일파'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1879-1939)은 그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한학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도 제법 강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겪은 일을 즐겨 한시로 읊었다. 그는 생전에 제법 규모있는 시집을 엮기도 하였다.
<다산시고多山詩稿>라 이름붙인 그 시집을 뒤적이다가 재밌는 부분을 찾았다.
아마 유럽 여행을 갔던 모양인데, 러시아를 거쳐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 거기에 이집트 지나 인도와 홍콩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나 보다.
가는 곳마다 한두 수씩 한시를 지었는데 제목부터 흥미롭다.
<독일 국민성>, <워털루 옛 전장>, <나폴레옹 무덤>, <로마 회고>...그중 <소사운하蘇士運河>, 곧 수에즈운하라 이름붙인 시를 풀어보니 다음과 같다.
수에즈 운하 뚫지 않았던들
하늘끝 희망봉 돌아야 했으리
지중해 물 홍해로 이어지니
예절부 공은 수 양제와 같네
蘇士運河若不通
迂回天末喜望峰
地中海水連紅海
禮節夫共煬帝同
'예절부禮節夫'는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 Ferdinand Marie de Lesseps(1805-1894)겠다.
그런데 레셉스가 만약 중국 역사를 알았다면, 자기를 수 양제에 비유하는 걸 기꺼워했을까?
안 그래도 수에즈 운하를 판 뒤 파나마 운하를 파다가 실패해 파산한 레셉스인데 말이다.
박영철이 그의 말로를 알고서 짐짓 수 양제를 끌어들인 것이려나.
*** Editor's Note ***
앞서 조성환 선생이 소개한 보음부이寶音夫而 폼페이를 읊은 박영철의 한시 에 이어지는 연작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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