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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부여 왕릉원(능산리고분군) 동고분군 정리

by taeshik.kim 2022.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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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이를 조사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연구소 현장설명회 자료에 토대한 것으로 문장은 내가 군데군데 다듬었고 읽기를 위해 문단 디자인을 했음을 밝힌다.

능산리고분군 주변 유적 분포

식민지시대 동고분 1호본

식민지시대 조사한 동고분 1호분

지중탐사로 드러난 동고분군

식민지시대 작성 동고분 분포도

식민지시대 동고분 원경


1) 1호분

(1) 위치와 조사과정
고분은 능산리산 남쪽 구릉에 있는 동고분군 동편 능선 아래쪽에 위치한다. 시굴조사에서 봉분, 묘광墓壙(무덤구덩이-인용자) 윤곽선, 일제강점기 조사 흔적 등이 확인되어 위치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었다. 이 고분은 일제강점기 동고분군 배치도를 참고하면 1호분으로 판단된다.

1호분


고분은 봉분이 남아있으나 그 경계 돌무더기 열이 확인되지 않아 조사는 묘광과 일제강점기 조사 자료 등을 통해 무덤방 위치와 규모를 파악한 후 묘광 장축 방향을 주축으로 삼아 너비 100㎝인 十자둑을 설치해 진행했다. 표면 흙을 제거하자 봉분(암갈색점질토)을 비롯해 기타 일부러 쌓은 토층(암갈색점질토-회황색사질토)이 봉분 바깥쪽까지 넓게 확인되고 그 아래 아래 옛 토층에서는 백제시대 수혈유구(구덩이-인용자)가 확인되었다.

고분 남쪽에서는 역凸자형 묘광 윤곽선과 일제강점기 조사 굴광 흔적도 드러났다.

내부조사는 묘광 중앙에 너비 50㎝ 남북 방향 둑을 남기고 또 현실玄室과 연도羨道, 묘도墓道에도 각각 동서 둑을 남기면서 진행했다. 조사 중 봉분 정점에서 약 200㎝ 아래에서 현실 천장석이 노출되었으며, 남쪽으로 연도의 천장석과 연문의 문비석을 확인한 후 묘도를 노출하였으며, 묘도는 당시 사용면까지 하강조사를 진행하였다.

(편집자주 : 한국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무족보 천지라, 현실玄室이라고 하는 시체를 두는 방을 기준으로 그 외부로 통하는 길을 각각 연도羨道와 묘도墓道라 하거니와, 이걸 우째 이런 말로 구분하는지 참말로 신통방통 신이경이를 자아내는데 간단히 말해 무덤방에서 무덤 대문으로 통하는 구간을 연도라 하고, 다시 그 대문 밖에서 묘역 밖으로 길게 낸 통로는 묘도라 하는 모양이다. 세상에 이런 어거지 말은 없다.)

토층 조사 후 연문 구조와 규모, 석실 내부조사를 위해 묘도 둑을 제거한 후 연문을 전면 노출했다. 이후 연문의 폐쇄상태나 규모 등을 기록하고 연문의 문비석과 받침석을 제거한 후 연도 내부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현실 내부조사에 들어가 그 벽과 바닥을 노출했는데, 그 과정에서 천장석 일부를 깨고 들어간 도굴구멍도 확인했다.

석실 내부

석실 바닥. 강돌과 깬돌이 보인다.


현실 바닥에는 목관 편 약간이 남았으니, 도굴 구멍에서도 금박편과 관을 만드는 데 쓴 못 일부가 발견됐다. 현실 바닥은 강돌을 깔았으며 그 위에 큰 깬돌들을 놓았으니, 일제강점기 조사 기록에서는 이 깬돌 무지를 관대棺臺로 추정한 바 있다.
이에 바닥시설 축조양상과 깬돌과의 관계를 확인하고자 탐색시굴갱을 설치하여 내부조사를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석실 벽석 바깥쪽 보강상태와 벽석 결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현실 묘광과 벽석 사이에 너비 100㎝ 탐색시굴갱을 설치하고는 내부조사를 진행했다.


(2) 유구
봉분은 일제강점기 기록에 의하면 평면 원형으로, 직경 13.4m, 잔존높이 1.5m 정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진에서도 육안으로 관찰될 정도로 봉분이 확인되는데, 이후 밭으로 개간되어 현재 외견상 봉분은 확인하기 어렵다.
봉분은 완만한 산 경사면을 상당 부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봉분 경계 바깥쪽까지 넓게 성토盛土하여 정지한 후 그 위에 암갈색점질토와 갈색점질토를 교차로 쌓아 만들었다.
봉분은 정지층 위 성토한 부분이 최대 40㎝ 정도 남아있다. 경계석은 확인되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기록을 살펴보면 봉분은 원형으로 추정되며, 규모는 잔존범위 등으로 볼 때 직경 20m 안팎으로 추정된다.

정지토는 후대 분묘로 인해 지형 변경이 이루어지고 일제강점기 조사가 이루어진 고분의 남편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확인된다. 정지토는 면이 일정하지 않은 구지표나 풍화암반토 위를 회백색사질토와 암갈색점질토로 교차로 성토하였으며 높이는 40~50㎝이다.

묘광墓壙은 산경사면을 ㄴ자형에 가깝게 굴착하여 조성했다. 평면형태는 역凸자형으로, 연문 쪽에서 좁아져 11자형 묘도가 달린 구조다. 묘광은 상부가 약간 경사지지만 거의 수직에 가깝게 파들어갔으며, 장축방향은 북-남으로 등고선과 직교한다.
규모는 전체잔존길이 1,450㎝이며 현실쪽 길이 510㎝, 너비 280㎝, 묘도쪽 잔존길이 1,380㎝, 너비(수직부분) 130~150㎝, 잔존최대깊이 250㎝이다.

묘광 충전토


묘광 내부에는 석실이 조성되어 있는데, 석실은 현실쪽 장방형 묘광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잔존 묘광 최대높이에서 205㎝ 아래에 대형 판석의 천장석이 놓여 있다.
석실은 현실 남쪽에 긴 연·묘도가 달린 횡혈식이며, 평면형태는 현실 중앙에 연도가 위치한 갑(甲)자형이다.
석실은 장대석을 이용해 만들었다. 장축방향은 북-남(N-4°-E)이며, 전체길이는 연문 제외 420~425㎝이다.
현실은 북단벽과 양장벽 모두 치석된 장대석을 5단으로 쌓고 양장벽에는 그 위에 장대석을 고임석으로 올려 축조되었다. 바닥에는 모래를 깐 후 그 위에 천석을 1~2겹으로 깔아 시설하였고, 그 위에는 비교적 큰 할석들이 11매 정도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 조사 기록에서는 이 할석들을 관대로 추정한 바 있는데, 위치상 관대일 가능성도 있지만 석재 크기나 형태에서 차이가 나므로 이에 대해서는 좀더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현실의 천장은 치석한 판석 2매를 올려 놓았다.

현문


남단벽에 만든 현문은 문주석, 문인방석, 문지방석을 갖춘 문틀식이며, 방형에 가까운 판석 1매를 문비석으로 이용하였다. 문비석 중앙에는 방형의 홈이 파져 있다. 현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269~270㎝, 너비 112㎝, 높이 146~147㎝이다.

연도는 양장벽을 장대석 4단으로 쌓아 축조했다. 평면형태는 방형에 가깝고, 규모는 길이 110~113㎝, 너비 98~99㎝, 높이 110㎝이다. 바닥은 기반토인 풍화암반토가 드러나 상태인데, 일제강점기 도면 자료를 보면 일부 천석이 깔려 있어서 현실 바닥과 마찬가지로 얕게 모래를 깐 후 천석을 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장은 판석 1매로 축조되었다.

연문


연도 남쪽에 난 연문은 문인방석과 문비석으로 이루어진 문틀식에 가깝다. 다만, 문주석은 현문과 달리 별도로 조성하지 않고 연도의 양장벽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연도 양장벽석 위에는 장대석 1매를 동서방향으로 길게 세워 문인방석으로 이용하였다.
연도는 방형에 가까운 판석 1매를 연문 입구에 세워 막았다. 이 문비석은 현문 문비석에 비해 거칠게 가공되었고 그 중앙에는 방형의 홈이 파져 있다. 이 문비석은 일제강점기 조사 후 다시 막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조사 기록에 의하면 연문 바깥쪽을 석회로 완전히 밀폐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문비석 바깥쪽 바닥에 문비석이 쓰러지지 않도록 석재를 받쳐 보강하였다.

문을 연 석실 내부



묘도는 연도 남쪽에 11자형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별다른 시설없이 양쪽 벽을 수직에 가깝게 굴광하여 이용하였다. 연문쪽 양벽에서는 할석으로 쌓은 석축시설이 확인된다. 규모는 잔존길이 1,380㎝, 너비 130~150㎝, 잔존최대깊이 250㎝이다.
바닥에는 중앙에 배수시설이 조성되었는데 그 위에 사질토를 깔고 다져서 바닥면으로 이용하였다. 배수시설은 U자형으로 굴광 후 할석을 채웠으며, 현실 바닥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굴갱이 현실 남동쪽 모서리에서 확인되고, 천장석 남동쪽과 현문 문인방석 일부를 깨져 있어서 도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굴갱


유물은 도굴과 일제강점기 조사로 인해 현실 내부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현실 내부와 도굴갱에서 금박편과 관정이 소수 수습되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내부에서 목관편과 관정, 철제쐐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목관편은 일제강점기 조사 후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당시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이나 도면에도 소개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조사자인 우메하라 스에지가 목관편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관정은 철지금장 10점 정도(반구형원두정), 철지은장 3점 정도(반구형원두정), 철제관정 30여점 정도(확인 가능한 것은 두부 평방두정)가 확인된다. 그리고 1호분에서 철제쐐기가 2점 출토되었는데, 문비석과 연도 천장 사이, 문비석과 연도 서벽 사이에 각각 1개씩 박아 현문을 막은 문비석을 고정하는데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5점의 불명철기가 확인되었다.

(2) 6호분

(1) 위치와 조사과정
고분은 능산리산의 남사면에 있는 동고분군의 동편능선 상단부에 위치한다. 6호분이 위치한 능선 상단부는 일제강점기에도 고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조사가 이루어진 1호분이 위치한 지점이다.
시굴조사에서 넓게 굴광한 흔적이 확인되어 이를 중심으로 너비 100㎝의 十자둑을 설치한 후 조사를 진행하였다. 표토를 제거하자 유구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기반토인 풍화암반토가 바로 드러났다.
다만 서쪽의 곡부쪽으로 퇴적층이 이어지고 있어서 이를 확인하고자 동서방향으로 탐색시굴갱을 설치하여 퇴적양상과 지형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석실묘의 도굴갱이 발견되었다. 이는 새롭게 확인된 고분이어서 조사단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5호분에 이어 6호분으로 명명하였다.
고분은 경사가 있는 사면부에 위치하여 오히려 봉분을 비롯한 고분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 고분은 조사지역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서 석실묘와 함께 일부 봉분과 묘광에 대해 우선적으로 조사를 실시하였다.
봉분 조사는 퇴적층 조사를 위해 설치한 기존 동서 시굴갱을 이용해 진행했다.

6호분 전경


성토한 봉분은 옛 지표에서 최대 160㎝ 높이로 남아있었으며, 석실 축조를 위한 묘광은 구지표 또는 기반토인 적갈색점질토와 풍화암반토에서 확인되었다.

묘광은 석실묘를 중심으로 남북 둑을 설치한 후 내부조사를 진행한 결과, 최대 잔존 묘광의 225㎝ 아래에서 석실 천장석이 노출되었으며, 그 남쪽에서 연도의 천장석과 연문의 문비석, 그리고 묘도를 확인했다.
묘도 내부는 무덤을 만들 당시 사용한 면인 회황색사질토까지 하강조사를 진행했다.
먼저 석실묘는 연문 구조와 규모, 석실의 내부조사를 위해 묘도 북쪽 둑을 제거한 후 연문을 전면적으로 노출했다. 이후 연문 폐쇄상태나 규모 등을 기록하고 연문의 문비석과 받침석을 제거한 후 연도 내부조사를 진행했다.
연도 내부에 흙은 거의 유입되지 않아 벽과 바닥을 노출한 후 현문 폐쇄상태나 규모 등을 기록하고는 현문의 문비석을 제거하였다.

묘광 내부 충전토


현실 내부에는 도굴갱을 통해 유입된 흙이 경사지게 퇴적되어 있어서 이를 걷어내면서 목관과 관정 등의 유물을 노출시키고 현실 내부조사를 진행하였다.
석실묘 조사 이후 봉분과 묘도에 대한 추가조사를 위해 고분 남동편으로 조사지역을 확대했다. 봉분 조사는 기존 동서시굴갱을 연장하여 조사했는데, 사면이 낮아지는 서쪽에서는 봉분 아래에서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성토층이 확인되어 이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였다.

6호분


묘광은 현실과 연도 사이, 묘도에 각각 동서둑을 설치하고 내부 하강작업을 진행하면서 조사했다. 그 결과, 고분 남편에서 두 차례에 걸쳐 봉분을 굴광한 묘광(묘도 쪽)이 확인되었다. 이에 먼저 2차 매장(추가장)을 위한 묘광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후 1차 매장을 위한 묘광과 묘도 바닥, 배수시설 등을 확인하는 조사를 진행하였다.
봉분 외곽에서는 경계석과 함께 2단 석축시설도 확인되어 고분 남쪽의 봉분과 묘도, 석축시설과 하부 정지층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탐색시굴갱을 설치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2) 유구

고분은 동편능선 중심이 아닌 서쪽 사면부에 위치하고 있어 능선상에 위치하는 다른 왕릉급 고분들과 약간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면부 입지로 인해 오히려 봉분이 잘 남아있는 편이다.
봉분 조성에 앞서 곡부로 이어지면서 지형이 낮아지는 서쪽과 남쪽은 고분 조성을 위해 풍화암반토와 갈색점질토 등으로 성토하여 비교적 평탄한 대지를 조성하였다. 서쪽 대지조성토 가장자리에는 잡석을 일렬로 놓거나 일정 범위로 경사지게 놓아 흙이 밀리지 않도록 보강하였다.
봉분은 구지표 위에 두껍게 모래를 깔고 그 위에 황갈색사질토와 적갈색사질점토를 교차로 성토하였다.
봉분 규모는 고분 남동편에서 확인되는 경계석렬로 추정해 보면 최대 직경은 20m 내외이며, 높이는 구지표 위의 성토된 부분이 160㎝ 정도 남아있다. 그리고 고분 앞쪽인 남쪽에는 매장(1차) 후에 2단 석축시설을 만들어 묘역을 조성하였다.
묘광은 석실 축조와 매장을 위한 것으로 구분된다. 먼저 석실과 1차 매장을 위한 묘광은 평면형태가 ㄱ자형에 가까우며, 묘도는 八자형으로 벌어지는 모습이다.

연문


묘도는 봉분 경계석(남쪽) 바깥쪽 석축시설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경사가 낮아지는 남쪽부분은 양쪽에 석재를 놓아 벽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전체잔존길이 1,670㎝이며 현실쪽 길이 530㎝, 너비 420㎝, 묘도쪽 잔존길이 1,140㎝, 너비 200(추정)~400㎝, 잔존최대깊이 380㎝이다.
묘광 중 현실과 연도, 묘도 일부는 봉분 조성 전에 구지표나 기반토인 적갈색점질토와 풍화암반토를 수직에 가깝게 파내려갔으며, 묘도쪽은 봉분 조성 후 봉분에서부터 경사지게 내려가다가 하부에서 수직에 가깝게 파내려갔다.
2차 매장을 위한 묘광은 1차 묘광보다 약간 동쪽에 치우쳐 있는데 상당부분 중복된다. 동편의 경우 1차 묘광보다 바깥쪽에서부터 넓게 굴광하였고, 서편의 경우 1차 묘광 내부의 충전토를 굴광하였다. 2차 묘광도 봉분에서부터 경사지게 파들어갔으며, 남쪽의 봉분 경계석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문


2차 묘광의 규모는 잔존길이 1,100㎝이며, 묘도쪽 너비 470㎝ 내외, 잔존깊이 380~70㎝이다. 1차와 2차 묘광의 내부는 모두 사질토과 점질토를 교차하여 켜켜이 쌓아 충전하였다.
묘광 북쪽 내부에는 석실묘(용어가 잘못됐다. 무덤방을 말한다-인용자 주)가 조성되어 있는데, 석실은 현실쪽 장방형 묘광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위치하며, 최대잔존 묘광의 225㎝ 아래에서 대형 판석의 천장석이 확인된다.
석실묘는 현실 남쪽에 긴 연·묘도가 달린 횡혈식이며, 평면형태는 현실의 동쪽에 연도가 위치한 ㄱ자형이다. 석실은 치석한 판석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석실의 장축방향은 북-남(N-8°-W)이며, 전체길이는 연문 제외 435㎝ 정도이다.
현실은 북단벽과 양장벽 모두 1~3매의 치석된 판석을 세우고, 양장벽에는 그 위에 장대석을 고임석으로 올려 축조되었다. 바닥은 여러 매의 작은 판석을 빈틈없이 짜맞추어 깔았으며, 천장은 치석한 판석 3매를 올려 놓았다. 남단벽에 만들어진 현문은 문주석, 문인방석, 문지방석을 갖춘 문틀식이며, 방형에 가까운 판석 1매를 문비석으로 이용하였다.

현문 개방후


현실은 평면형태가 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280㎝, 너비 150㎝, 높이 165㎝이다.

연도 양쪽 벽면은 다듬은 판돌 1매를 세워 만들었다. 연도는 평면형태가 방형에 가깝고, 규모는 길이 102~104㎝, 너비 86~92㎝, 높이 112㎝. 바닥은 기반토인 풍화암반토 위에 적갈색점질토를 깔아 이용했으며 천장은 판석 2매로 축조했다.
연도 남쪽에 난 연문은 문인방석과 문비석으로 이루어진 문틀식에 가깝다. 다만, 문주석은 현문과 달리 별도로 조성하지 않고 연도 양장벽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연도 양장벽석 위에는 장대석 1매를 동서방향으로 길게 세워 문인방석으로 이용했다. 연도는 장방형 판석 2매를 연문 입구에 세워 막았다. 그리고 문비석 바깥쪽 바닥에 작은 깬돌이 끼워져 있을 뿐 별도 보강석이 확인되지 않는다.

석실 내부


묘도는 연도 남쪽에 八자형에 가까운 형태로 이어지는데, 별다른 시설없이 양쪽 벽을 굴광하여 이용하였다. 연문쪽 양벽에는 할석으로 쌓은 석축시설이 짧게 확인된다.

묘도는 봉분을 파고 두 차례에 걸쳐 조성되어 추가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1차 매장과 관련되는 묘도는 봉분에서부터 경사져 내려가다가 하부쪽에서 양쪽 벽을 수직에 가깝게 굴광하여 이용하였다. 묘도의 바닥은 남쪽 봉분 경계석의 바깥으로 갈수록 지형을 따라 약간 경사져 내려가고 있다. 묘도 바닥에는 중앙에 배수시설이 조성되었는데 그 위에 사질토를 깔고 다져서 바닥면으로 이용하였다. 석축시설이 만들어진 고분의 남쪽은 경사가 낮아 배수시설 위에 묘도 바닥을 조성하기 위한 성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배수시설은 U자형으로 굴광 후 할석을 채워 만들었는데, 경사가 낮아지는 고분의 바깥쪽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으며 현실 바닥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차 묘도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봉분 경계석을 들어냈다가 매장 후 묘도 내부를 충전하면서 재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 바닥


2차 추가장과 관련되는 묘도는 1차 묘도의 충전토와 봉분을 파고 만들었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급하게 경사져 올라가다가 봉분 경계석 부근에서 끝난다. 2차 묘도의 바닥면도 사질토를 깔고 다져서 이용하였다. 2차 묘도를 조성하면서 봉분 경계석의 상부가 흐트러진 것으로 추정된다.
도굴갱은 현실의 동벽쪽에서 확인되며 중앙에 있는 천장석의 동쪽이 깨져 있어서 이 곳을 통해 도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도굴로 인해 현실 내부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도굴갱에서 금도금 목관편, 관고리, 금사金絲 등이 수습되었고, 현실 내부에서도 관정, 금사가 소량 확인되었다.

묘도 내부 토층. 이걸 근거로 추가장을 추정한다.



(3) 수혈유구

백제시대 수혈유구는 모두 11기가 확인되었다. 1~9호 수혈유구는 1호분 주변에서 확인되는데, 고분 묘광 서편에 위치한 1호 수혈을 제외하면 나머지 수혈은 모두 고분 북편에서 확인된다.
수혈들은 고분을 조성하기 위해 성토한 정지토층을 기점으로 시기가 구분되는데, 1~3호 수혈유구는 정지토를 굴광하였고 내부토가 1호 봉토과 흡사하여 고분 조성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이와달리 4~9호 수혈은 구지표층을 굴광하여 고분 조성 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9호 수혈유구에서는 백제 토기들이 출토되어 고분 조성 전의 생활 유구로 추정된다.
그리고 10~11호 수혈유구는 6호분 석실 묘광의 동·서편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봉분 아래에서 확인되어 위치와 배치 양상으로 볼 때 6호분 조성과 관련된 시설로 판단된다.

유구명 평면형태 규모(㎝) 출토유물 성격 및 시기
길이 너비 깊이
1호 수혈 원형 34 31 13 · 1호분 관련 시설
2호 수혈 원형       · 1호분 관련 시설
3호 수혈 원형 44 39   · 1호분 관련 시설
4호 수혈 · 85 65   · 1호분 이전 조성
5호 수혈 원형 60 34   · 1호분 이전 조성
6호 수혈 원형 22 32   · 1호분 이전 조성
7호 수혈 원형 49 32   · 1호분 이전 조성
8호 수혈 · 50 48   · 1호분 이전 조성
9호 수혈 원형 235 158 110 토기 1호분 이전 조성
10호 수혈 원형 71 50   · 6호분 관련 시설
11호 수혈 원형 47 49   · 6호분 관련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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