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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분노에 차서 다시 달려간 배꽃, 간밤을 휩쓴 빗소리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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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경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친구가 나들이 하라고 불러서 득달같이 달려갔다. 생업에 치여 그 또한 정신 차리지 못하는 일상이요 자발백수인 나는 요새 무슨 학술이벤트랍시고 하나 만들어 준비한다고 넋이 나갔으니

함에도 치어박혀 지낼 수만은 없어 더러 짬을 내서 바깥 구경을 하거니와

그런 바깥 구경 한 번 하는 일로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일도 요새는 다 부질없는 짓이라 여기기에 계우 그런 일이 있었노라 해서 짐짓 인생 조망하는 듯한 한두마디 덧보태어 일기 겸해서 그런 정리를 하는데 지나지 아니한다. 

밤을 새다시피한 여파인지 내내 몸은 무겁기 짝이 없어 죽죽 늘어졌고, 눈은 계속 감겼으니, 애써 마중 나와 내내 드라이브니 꽃구경이니 해서 내내 태어다닌 친구한테는 미안하기 짝이 없었으니,

더구나 날씨는 왜 그런지 느닷없이 30도 육박하는 그 더위에다가 요샌 눈까지 사정이 좋지 아니해서 내내 선글라스를 끼고도 눈뜨기도 쉽지 않았다. 
 

수분이 한창인 배밭

 
그래도 내가 달려간 까닭은 첫째 간만에 보는 친구를 본다는 반가움 때문이었고, 둘째 며칠 전 실패한 그 배꽃을 다시 담기 위함이었다.

대학 동창들과 직전 찾은 배꽃밭은 유감스럽게도 만개라 하기엔 부족함이 있어, 마침 기온까지 솟구쳤으니 비록 며칠 차이이기는 했지만 이쯤이면 만발했으리라는 직감이 작동했으니, 내 만개한 너를 모름지기 품고 말리란 오기 때문이었다고 해둔다. 

실제 배꽃밭은 그러했다. 불과 사나흘전과 사정이 사뭇 달라져 천지는 온통 흰꽃을 뿌렸으니, 누구던가? 이조년이던가?

이런 날 등불을 밝힌 배밭은 그야말로 이화李花에 월백月白하지 아니하겠으며 태백에 기대건대 백대지과객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이곳에서 호롱불 켜고 밤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 거름 냄새 물씬하고 이른바 수분한다 해서 배꽃끼리 교배하는 동남아 일꾼들을 담으며 이제는 어디서건 배얌이 튀어나올 연두색 넘어 짙푸름으로 변질한 클로바 배나무 터널을 지나며 모란 작약 오기 전 이 물씬한 봄을 즐겼노라 해 둔다. 
 

요새는 늙은 나무를 더 경외한다.

 
같은 자리 같은 배밭이라지만, 늘 같은 자리에서 보는 그것과 그것을 횡단하는 묘미는 다르다.

나는 이 즈음 배나무 밭을 풀풀 풍기는 거름 냄새가 좋다.

이 거름 냄새야 내가 고향을 탈출하기 전 그 시절에는 인분이나 소마굿간을 쳐서 나온 소똥과 인분을 버무린 그것들이 풍기는 그것이 역함도 있었지만,

요새야 이 거름도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는지 약간은 뭐랄까 신식 냄새 그런 폼새가 나서 좋다. 

저 배밭 하나를 관통하고서 한 고비를 넘어서니 농로가 나오고 그 너머 또 다른 배밭이 펼쳐진다.

같은 배밭이라는데 그 풍광은 사뭇 달라 방금 지난 그 배밭이 이제 한창 청년인 배나무 군락이라면 이곳은 늙어 비틀어진 그런 배나무가 그득그득한 노인정이라,

나한테는 이런 배밭이 장땡이었거니와 그 늙은 배나무가 베베 꼬아가며 늙어간 주름에서 난 농삿일 한창이었던 아버지랑 엄마를 본다.

그랬다 그건 경이였다. 
 

포토 바이 Noh

 
개중 맥없이 아마도 올해가 지나면 베어지고 말 늙은 배나무 하나 골라 올라타고는 그 배꽃이 선사하는 지평선 너머로 굽어본다. 
 

 
오늘 새벽 저곳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제법 많은 비가 제법 장시간 내렸다. 

두고 온 그 배밭은 어제 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우수수 비듬을 그림 같이 털어냈다.

아마 오늘 새벽 두고 온 배꽃 절반은 낙상했으리라. 

배꽃 구경은 실컷했으니 이제 모란 작약을 기다린다. 
 

포토 바이 N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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